김수자 '세상을 엮는 바늘' 초대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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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서울 태평로 로댕갤러리 앞에는 트럭 한 대가 서있다. 폐차 직전처럼 보이는 몹시 낡은 트럭에는 형형색색의 보따리가 잔뜩 실려 있다. 이 트럭은 먼 길을 달려왔다.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대를 받았다 얼마 전 서울로 돌아온 것. '보따리' 작업으로 최근 해외 무대에서 주목을 끄는 설치미술가 김수자(43)씨가 이 트럭의 주인이다.

그는 24일부터 이 곳에서 '세상을 엮는 바늘' 이라는 제목으로 초대전을 갖는다.

조각가 로댕의 '지옥의 문' 과 '칼레의 시민들' 을 소장하고 있는 로댕갤러리 개관 후 국내 작가로는 첫 전시다.

김수자는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2년 뉴욕의 비영리 갤러리 P.S.1 스튜디오 프로그램에 선발된 후 이스탄불(97년).상파울루.시드니(98년).베니스 비엔날레와 아시아.태평양 트리엔날레(99년) 등 각종 국제전에 불려다녔다.

98년부터 뉴욕에 살고 있는 그는 29일 개막되는 제3회 광주 비엔날레 특별전 '인간과 성' 에도 출품한다.

그는 이불보와 보따리.헌 옷가지로 삶에 대한 명상을 시도한다.

어머니와 함께 이불을 꿰매다 천의 앞면과 뒷면을 종횡무진 오가는 바느질을 통해 예술의 재료로서 이불보를 새롭게 발견하게 됐다.

"이불에 새겨진 목숨 수(壽), 행복 복(福)에는 무병장수를 소망하는 인간의 마음이 드러나 있어요. 그 이불을 덮고 잔 사람들의 체취가 묻어있기도 하구요. "

처음에는 삶의 은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이불보를 바느질해 물체를 감싸거나 이불보를 늘어놓고 그 사이를 걷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보따리는 여기서 한발짝 나아가 '떠남' 을 의미한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정들만 하면 이사를 다녔던 어린 시절부터 커서도 남들이 "역마살이 꼈다" 고 말할 정도로 미국.이탈리아.브라질.중국.인도 등 작품 발표를 위해 돌아다녀야 했던 자신의 모습이 반영돼있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설치 3점과 비디오 4점을 선보인다.

'빨래하는 여인' '바늘여인' 등 비디오 작업에선 명상적인 면이 더욱 강조된다. 자신의 몸을 바늘에, 이 세상과 자연을 천에 비유하는 퍼포먼스다.

인도 야무나 강가에서 강물에 흘러가는 부유물을 응시하거나 도쿄.베이징 시내 한복판에 서서 오가는 행인들의 반응을 담았다.

"도시마다 사람들의 반응이 다른 것이 참 재미있다" 는 그는 카이로와 런던으로 이 작업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이번 전시는 로댕갤러리의 장소적 특성을 활용한 점이 특징. '지옥의 문' 과 '칼레의 시민들' 사이에 드문드문 놓인 헌 옷가지들은 마치 조각상이 벗어놓은 듯 하다.

김씨는 "전시장에 들어서는 관람객이 로댕이 조각한 인체와 그 몸에서 나온 허물을 발견하는 순간 자신과 연결짓는 삼각 구도를 의도했다" 고 설명한다.

글래스 파빌리온의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느낌과 허공에 매달려 너울거리는 울긋불긋한 이불보의 어울림이 색다르다.

또 갤러리 외부 도로에도 트럭과 함께 원색 천을 길게 설치했다. 티켓 한장으로 호암갤러리의 '한국과 서구의 전후 추상미술' 전도 볼 수 있다. 30일엔 인도음악 그룹 '오리엔탈리카' 의 연주가 마련된다.

4월30일까지. 월 휴관.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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