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환상속의 '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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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닷컴' 세상이다.

여기 저기서 네온사인이 '닷컴' 을 번쩍인다. 코스닥에서도 '닷컴' 은 상종가를 친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시사주간지 타임이 커버스토리를 '닷컴' 으로 했을까. 컴퓨터가 연결해주는 가상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정보를 찾고 물건도 사고 여행 예약도 한다.

이제 우리는 한 몸이면서 동시에 '두 세상' 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나는 발을 딛고 숨을 쉬는 현실 세계요, 또 하나는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가상세계다. 그래서 처음 만난 사람끼리 주고 받는 연락처도 하나 더 늘었다. 가상세계에서 자신이 존재하는 곳 - e-메일 주소다.

존 브록만이 세계에서 내로라 하는 지성인 1백10명에게 e-메일을 보내 그 회신을 엮어 펴낸 '지난 2천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 에도 컴퓨터와 컴퓨터 네트워크는 다섯 표나 얻고 있다.

1백10명이 꼽은 인류의 위대한 발명이 1백21가지에 불과하니 다섯 표의 비중은 실로 대단하다. 인간의 중추신경계, 말하자면 정신을 甁洸?杉募?컴퓨터의 데이터 베이스나 시뮬레이션 기능을 꼽은 것이 세 표, 온라인으로 세상을 연결하는 인터넷이 두 표다.

비행기나 피임약이 가져다 준 '실질적인 인간 행동의 확장' 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가상공간의 확장' 에 여지없이 밀려나고 말았다.

과연 인터넷 세상은 마냥 편리하기만 한 것일까. 모든 기술은 '한계효용' 을 지닌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흔히 기술을 어떤 경우에도 가장 효율적인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설혹 효용성이 떨어진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더라도 그들 또한 언젠가 더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 이를 해결해주겠거니 하고 믿는다. 기술 만능주의에 빠져든 현대인들에게 기술은 영원히 '환상 속의 그대' 다.

비행기는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날아 이동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시켜준다. 거리와 시간의 관계로만 보면 이렇게 효율적인 교통수단도 따로 없다. 그러나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자동차로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비행기로는 30분만에 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행기의 시간' 일 뿐 '이용자의 시간' 은 아니다. 이용자는 비행기 탑승시간 이외에도 비행장까지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 탑승 수속에 걸리는 시간, 목적지에 내려 짐을 찾는 등 통과수속을 거치는 시간을 써야 한다. 그래서 때론 자동차가 비행기보다 결과적으로 목적지에 빨리 데려다주는 효율적인 교통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비행기의 편의성에 취한 이들은 쉽게 이런 사실을 잊어버린다. 아니, 생각조차 하려 들지 않는다. 더욱이 새로운 기술에 있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가상공간의 점령' 이 현실 생활의 생존을 좌우하는 세상에서 옆을 쳐다 볼 여유도 없이 인터넷으로 돌진해가는 이들에게서 '언제나 자동차는 느리고 비행기는 빠른 것' 이란 생각의 그림자를 보는 것은 비단 나 뿐일까.

낮과 밤이 뒤바뀐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수시로 교신할 수 있는 온라인 세상에도 '기술의 효용한계' 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터넷 만능주의' 는 간단하게 옆 사람에게 물어봐도 될 일을 가지고도 이리 저리 적합한 정보 사이트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 수 있다.

나아가 낡은 것은 더 이상 생산적이 아닌 것으로 치부해서도 안된다. 기술을 활용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며 각자 처해진 상황에 따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고백 한 가지 - 최근 나는 50명으로부터 e-메일을 받았다. 이들이 보낸 e-메일에는 각기 첨부파일이 딸려 있었다. 첨부파일을 열어 프린트하고 제대로 첨부파일이 오지 않은 이들에겐 다시 e-메일을 보내곤 하다보니 두 시간이 후딱 지났다. 다음날 모두 한 자리에 모였을 때 서류를 받았다면? 5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일이었다.

홍은희<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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