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우의 행복한 책읽기] 실사구시의 한국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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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임형택(성균관대 한문교육과)교수의 '실사구시의 한국학' (창작과비평사)에 실린 글들은 두가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 하나가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전 지구적으로 불고 있는 세계화 바람앞에 민족문화의 가치가 '전통보존' '문화상품 개발' 의 차원에서 인정되고 있는게 고작인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기술정보와 경영능력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자본주의의 전일화로 인문학이 소외.무시되는 현상이 날로 심해지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책 제목이 함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전시대 실학이 이룩했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성과를 앞으로 우리 자신이 법고창신(法古創新)으로 뛰어넘도록 힘써" 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지당한 말씀 아닌가.

그러나 새로울 것 없는 이런 원칙적인 처방 외에 달리 선택할 길이 없다는데 우리 현실의 복잡미묘함이 있다.

다시 저자의 말을 빌면 "이 땅에서 제 나라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 특화되어야 하는 현상 자체가 마뜩치 않지만 거부하기 또한 어려운 형세다." 왜냐하면 지식 정보의 백화점에 '우리 것' 의 가공품으로 코너 하나 정도 차지해서는 별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조선시대 실학을 성립시킨 주요 인물인 박지원과 정약용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그들의 주체적이며 선구적인 현실인식과 학문적 성과를 부각시키고 있다.

또 근대계몽기에 실학이 어떤 경로를 통해 부활했는지를 살피고 30년대 이른바 '조선학' 의 수립과정에서 실학이 어떻게 학적 개념으로 정립되었는지 조명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실학이란 결국 조선왕조의 주역으로 성장한 사대부들의 '자아의 발견' 과 관련된 문제다.

한국인의 주체성과 한국학의 정체성을 해명하는 자리에 다시 실학이 전면에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실학과는 거리가 있으나 역시 역사적 전환기에 지식인의 주체적 사유의 문제와 관련해 긴요한 생각거리를 제시한 글로 고려말의 문장가 이색을 다룬 '고려말 문인지식층의 동인의식(東人意識)과 문명의식' 이 있다.

임교수는 원나라를 무조건 폄하하는 식의 고정관념에 동의하지 않고 당시 국제정세에서 한 지식인이 어떤 과정을 거쳐 주체적 인식에 이르렀으며 후일 이것이 어떻게 다양한 평가를 불러일으켰는지를 해명하고 있다.

이밖에 영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단편 '류우춘전' (柳遇春傳)을 분석한 '18세기 예술사의 시각' 과 김삿갓(金笠)을 다룬 '이조 말 지식인의 분화와 문학의 희작화(戱作化)경향' 도 재미있는 글이다.

전자는 영정조 시대에 학풍 및 문학.미술 분야에서 새 물결이 일어난 반면 음악 부문에선 이렇다할 새로운 움직임을 발견할 수 없다는 통설에 도전하고 있다.

임교수는 18세기 서울에 살았던 예능인들의 사회.경제적 처지를 자세히 규명하고 그들이 의식적 각성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예술가로 도약하지 못함으로써 받게된 정신적 고통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또 후자에선 방랑문인 집단에 대한 고찰을 통해 풍자를 주로하는 희작화 경향이 한문학을 어떻게 내부로부터 분해하는 작용을 일으켰는지 고찰하고 있다.

이 책은 근대주의의 서편향과 민족주의의 동편향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시대적 임무를 안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많은 지적 자극을 줄 것으로 보인다.

남진우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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