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강은 경계없이 흐르고] 5. 남한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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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서로 아울러 작은 시내가 큰 개울이 되고 속리산에서 내려온 물줄기를 받아 더 넓고 깊은 강물이 되었다가, 마침내 양수리에 이르러 북한강과 합쳐서 서울로 들어가는 남한강은 우리나라 강 중에서도 가장 사연이 많은 강이다. 나라의 허리, 그 한복판을 감고 흘러 예부터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뿐 아니라 길이는 압록강.낙동강.두만강에 이어 세번째에 그친다하나 나뭇가지 모양을 하고 있는 유역은 제일 넓어 곳곳에 기름진 들판을 이루면서 가장 물산이 풍부한 강이 되기도 했다.

단양.영월 등 곳곳에 선사 유적지가 있고, 충주산성.적성산성 등 산성이 있고, 중앙탑.미륵사지 등 절터가 있는 것도 다 그래서다.

삼국시대 이곳은 고구려.신라.백제의 세 나라가 기를 쓰고 싸운 전쟁터이기도 했다.

남한강을 차지하는 나라가 나라를 전부 차지한데서였다. 중원 고구려비와 온달산성 그리고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에는 아직도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고, 강 유역 곳곳에서 고르게 세 나라의 유적이며 유물이 찾아지는 터다. 그러나 이 강이 세나라의 경계가 된 일은 없었다. 강을 차지한다는 것은 그 건너의 땅과 사람을 다 차지하는 것을 뜻했다.

실제로 남한강은 오랜 세월 경계보다는 길의 역할이 더 컸다. 기차며 버스 등 육로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강은 더 없이 유용한 길이어서, 내륙 사람들이 서울길에 배를 이용하는 것은 물론 새재나 죽령을 넘어 서울로 향하는 나그네도 고달픈 육로보다는 단양이나 충주에서 배를 타고 나머지 여정을 메꾸는 경우가 더 많았다.

또 바다에서는 소금과 어물이 배에 실려 강을 따라 내륙지방으로 올라왔고, 밤이며 콩 그리고 목재 등 서울에서 필요로 하는 산물은 거꾸로 강을 따라 내려갔다.

서울에서 소금과 어물을 싣고 올라가던 배가 나루에 닻을 내리면 그날이 곧 장날이 되었으니, 이런 갯벌장은 여주.목계.청풍.매포.덕포(영월) 등 여러 곳에 섰다.

자주 올라오는 장곳배가 아니었기 때문에 장은 여러날 이어졌고, 장이 여러 날 되니까 난전이 서고, 색주가가 모여들고, 노름판과 씨름판이 벌어졌다.

갯벌장이 서는 곳이면 정초면 배의 무사 운행과 장사의 번창을 비는 별신제를 벌이고 편을 갈라 줄다리기도 했다.

뗏목이 남한강의 장관이던 시절도 불과 50여년 전이다. 정선의 산 속에서 메어진 원목들은 대개 아우라지 나루에서 뗏목으로 엮여, 천리 물길을 따라 서울로 운반되었다. 뗏목은 혼자서 뜨는 법이 없었다. 열 대, 스무 대가 동무가 되었는데, 한 뗏목에 앞뗏목꾼, 뒷뗏목꾼 해서 둘이 탔다.

이른봄에 시작되어 가을걷이가 끝나는 초겨울에 마감하는 이 뗏목의 행렬에서는 노래가 그치는 법이 없었다.

앞뗏목꾼이 선소리를 하면 뒷뗏목꾼이 뒷소리로 받고, 앞뗏목에서 노래가 끝나면 뒷뗏목이 새로 시작했다. 뗏목이 아니었던들 정선 아리랑이 그토록 풍부한 내용을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남한강은 내륙에서 서울로 가는 개념의 길만이 아니었다. 건너는 개념의 길이기도 했다. 승용차는 말할것도 없고 자전거도 귀하던 시절, 고개를 넘어야 하는 마을보다는 강을 건너는 마을이 훨씬 가까운 이웃이었다.

쪽배만 저으면 금세 갈수 있고, 아무때나 쓸 수 있는 쪽배 서너 대는 으레 강가에 메어져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강언덕에 나가서면 뿌연 안개 속에서도 건너편 강언덕에 나와 서는 사람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어, "김서방, 오늘 장에 가거든 배추씨 좀 사다 줘" 하고 부탁할 정도였다.

생일밥이나 모밥을 얻어먹으러 강을 건너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계도 함께 하고 두레도 함께 했으며, 당연히 관혼상제도 같이 치렀다. 운동회 같은 때는 같은 편이 되어 달리기에도 나가고 씨름도 했다.

강을 사이에 둔 이웃은 학교도 함께 다녔기 때문에, 행정 편의에 의한 인위적인 구획도 이들을 갈라놓지는 못했다.

산을 사이에 둔 이웃보다는 강을 낀 이웃이 혼인 등으로 더 끈끈하게 이어져 있는 것은 적어도 한 세대 이전에는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한강에서 머지 않은 곳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나는 남한강을 아름다운 강으로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특히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던 봄날의 강마을들을 잊지 못한다. 강마을들은 대개 언덕 높드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살구꽃에 이끌려 낯선 강마을에 들어가 보면 갯비린내가 나는 초가집 마당에서 초로의 아낙네는 감자씨를 고르고 머리가 허연 그의 남편은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살 구꽃잎이 떨어지는 마당에는 황토가 빨갛고, 그 위를 노란 햇병아리들이 삐악거리며 돌아다녔다.

술보다도 안주로 딸려 나오는 피라미 조림이 더 맛있던, 동네 밖 한 귀퉁이에 나앉아 있던 주막집도 잊을 수가 없다. 담없는 그 집 마당에도 살구꽃잎은 떨어져 땅거미와 함께 얼룩을 그려 놓고 있었다.

이제 남한강은 옛날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저수량 27억 5천만㎥, 발전용량 40만㎾의 국내에서도 두 번째로 큰 댐이 만들어지면서 중허리가 물바다가 된 것이다.

이곳에 자리잡고 있던 아름다운 나루와 강마을은 시퍼런 물속에 잠겼고 강을 따라 펼쳐졌던 기암절벽은 그 꼭대기만 앙상하게 물위에 떠 있다.

많은 조상들의 삶의 흔적이 사라졌으며 노래와 얘기도 묻혀버렸다. 변한 곳은 댐으로 막힌 곳만이 아니다.

강가의 모든 길이 포장되고 승용차가 일상화하면서 쓸모가 없어진 나룻배와 나루는 모습을 감추었고, 강을 길삼아 드나들던 이웃이 마침내 먼 남의 고장이 되었다. 드문드문 다리가 놓이기는 했으나 그것이 강을 길로 만들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랐던 것이다.

그래도 봄이 오는 남한강은 아름답다. 오랜 가뭄에도 불구하고 겨울을 이겨낸 기쁨으로 풀빛이 도는 여울물은 자못 힘차고, 한길이 넘는 물속은 옛날처럼 맑다.

먹이를 찾아내어 내려꽂히는 물떼새의 몸짓이 여간만 날렵하지 않고 물총새의 울음소리가 한결 쇠된 것을 보면 그들도 봄을 맞는 기쁨에 들떠 있는 것 같다.

물기를 머금은 버들개지가 어른거리는 물속에서는 모래무지와 북납자루가 가만가만 바닥을 기고 바위틈에서 잠시 얼굴을 내밀었던 가재가 인기척에 기겁을 하고 줄행랑을 놓는다.

허리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올갱이를 줍는 아낙네도 보인다. 대추나무와 가죽나무가 줄지어선 강마을이며 잡목으로 덮인 산도 빛깔이 화사하다.

머지않아 봄비가 강을 적시면 강가의 이쪽 산과 저쪽 언덕이 개나리와 진달래로 붉고 노랗게 물들리라. 살구꽃도 피고 복사꽃도 피리라. 겨우내 우리를 우울하게 했던 어두운 얘기들을 활짝 걷어내면서.

신경림 시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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