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손숙·윤석화, 연극 '세자매'서 개성 대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연극계의 '세 자매' 가 모이니 분위기부터 예사롭지 않다.

지난 7일 오후 서울 신촌의 산울림 소극장 2층 연습실. 다음달 문예회관 대극장(13~30일)에 오를 안톤 체호프(1860~1904)의 '세 자매' 대본 연습이 한창이다.

큰언니 박정자(58)가 미리 와 기다리고 있다. 30분 정도 늦게 나타난 막내 윤석화(45)가 연습장으로 뛰어든다. "작은 언니는 어디 있어?" 연출가 임영웅(64)이 대답한다. "석화가 안 온다고 해서 가버렸다. "

5분 후. 둘째 손숙(56)이 미안해 하며 들어선다."외부강연이 있었어. 차가 너무 막히는 것 있지. "

말 많은 윤석화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큰 언니가 엎드려 뻗치래. " 박정자가 웃는다.

"얘는! 자기도 늦었으면서. 모두 바쁜 걸 다 아는데. " 일상에서나 연극에서나 자매처럼 절친한 한국연극의 '여성 빅3' 박정자.손숙.윤석화가 처음으로 한 무대에 선다.

지난 30여년간 한국 연극의 '선두' 에 섰던 그들이 호흡을 맞추게 된 것. 작품 제목도 '세 자매' 다. 한국 리얼리즘 연극의 기초를 다진 고(故) 이해랑(1916~89)의 11주기를 추모하는 공연이다. 세 배우는 모두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들. 그만큼 의미가 큰 무대다.

연극 '세 자매' 는 러시아 혁명 이전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한 도시에 사는 세 자매의 얘기. 지긋지긋한 지방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모스크바로 돌아가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아 모스크바행은 결국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연출가 임영웅은 "등장인물 모두가 상대방에게 무관심하고 고독하고 불안해 한다는 점에서 현대연극의 효시에 해당한다" 고 평가한다.

세 배우는 각기 나이 순(順)대로 연기한다. 박정자는 보수적이고 신중한 여학교 교사인 큰언니 올가, 손숙은 결혼생활에 불만이 큰 낭만주의자 둘째 마샤, 그리고 윤석화는 세상물정을 모르는 막내 이리나로 나온다.

자리를 카페로 옮겼다. 서로 연극 얘기를 하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다. 발랄한 윤석화가 딴죽을 건다. "나는 노래를 하고 춤도 추는 둘째 역이 좋아. 제비뽑기로 다시 결정하자. " 손숙이 받아친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한 살이라도 어려지고 싶다. "

어린애들처럼 장난치는 것 같지만 상대역에 대한 신경전이 첨예하다.

박정자가 정리한다. "누구보다 막역한 사이지만 경쟁도 대단하죠. 어차피 무대에선 둘도 없는 라이벌이 아닙니까. " 그래서 걱정부터 들었다. 배우들의 조화가 생명인 연극에서 각기 개성이 강한 세 스타가 훌륭한 앙상블을 빚어낼지 우려됐다.

박정자는 기우라고 단언한다. "우리는 프롭니다. 그럴 나이는 지났죠. " 손숙과 윤석화도 이구동성이다. 부딪히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서로 배려하기로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는 것. 임영웅도 "오히려 너무 친해 양보만 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고 거든다.

작품쪽으로 말문을 돌렸다.

" 세 자매 공연이 여러 번 있었죠. 정말 기억에 남는 무대가 돼야 한다는 중압감이 커요" (박정자), "겉으론 우리가 주목받고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남자들입니다. 그들의 선 굵은 연기를 기대하세요" (손숙), "인간이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이상향의 3가지 유형을 보여줄 겁니다" (윤석화). 마지막으로 그들의 '모스크바' (희망의 상징)를 물었다.

"인생은 회색빛이다. 배우의 업(業)에 충실할 뿐이다" (박정자), "모든 것이 허무하다.

열정의 불씨를 살려내겠다" (손숙), "내 영혼의 꿈을 미친 듯이 실현하는 작품을 만들겠다" (윤석화). 인터뷰 사진을 찍으면서도 서로 예쁘다고 칭찬해주는 그들이 한달 후 어떤 색깔의 무대를 꾸며낼지 기다려진다.

박정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