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 한국인의 '원초적 본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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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박정희(朴正熙)시대 공화당의 실세였던 김성곤(金成坤)재정위원장, 백남억(白南檍)정책위의장, 엄민영(嚴敏泳)내무장관 등이 술자리를 같이하면 "누가 머라캐도(뭐라고 해도) 이 정권은 대구고보 정권이제!" 하고 기세를 올렸다고 한다. 대구고보는 경북고등학교의 전신(前身)이다.

경북고 출신들이 대거 박정희정권의 요직을 차지한 것이 아마도 권력의 물결을 타고 특정고등학교 출신들이 득세한 효시(嚆矢)일 것이다. 경북고는 박정희에서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에 이르는 3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많은 요직을 차지했다. 겉은 육사.보안사 정권이면서 알맹이는 경북고 정권 같았다.

김대중(金大中)정부에 들어와서는 호남지역 일부 고등학교 출신들에 대한 편파인사의 정도가 지나치다고 해 비호남쪽의 불만이 높은 가운데 특정고출신 봐주기 인사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金대통령이 경고했다.

특정고 선후배간의 유착의혹은 지난해 옷로비사건때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사직동팀 수사를 선배인 김태정(金泰政)법무장관 부인 봐주기로 어물쩍 끝냈다는 의심을 받았을 때 한차례 논란이 됐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자신의 출신지역 고등학교 출신들에게 선후배 밀어주고 끌어주는 정실.편파인사를 하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한 것은 그런 행태가 엄연히 존재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시정할 의지를 천명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金대통령 발언의 참뜻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다.金대통령의 발언이 있은 뒤 청와대 비서관 두사람이 자리를 맞교환한 것이 그 증거다. 金대통령의 말뜻이 예컨대 청와대에 특정고교 출신 비서관이 얼마나 많은가에 관계없이 수석비서관 밑에 그의 고교후배만 앉히지 않으면 좋다는 것이겠는가.

정권이 바뀌면 논공행상(論功行賞)은 있게 마련이다. 미국에서는 1820년대에 스포일스(戰利品)제도라는 것이 도입돼 대통령 만들기에 공헌한 사람들이 각료와 대사에서 우체국장까지, 많으면 3만명에서 4만명 이상이 정치적인 임명직을 차지했다.

스포일스 제도는 그 뒤 능력본위의 제도로 바뀌었지만 백악관의 요직은 대개 '대통령의 사람들' 차지다.

케네디 백악관의 하버드 마피아, 지미 카터의 조지아 마피아, 닉슨의 캘리포니아 마피아는 미국판 가신(家臣)집단이다.

탁월한 두뇌집단이던 케네디의 하버드 마피아와 달리 카터의 조지아 마피아와 닉슨의 캘리포니아 마피아는 두뇌 없는 충성일변도의 집단이었던 것이 카터의 재선실패와 닉슨의 도중하차라는 비극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에서는 지금도 4년에 한번 대선 후에는 플럼북이라는 것이 발간돼 대통령이 임명할 자리의 리스트가 공개된다. 그러나 주요 인사에 출신고교가 반영되지는 않는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과 공화당 대선후보인 아들 조지 W 부시가 다닌 필립스 아카데미,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그로튼, 존 F 케네디의 초우트를 비롯해 뉴잉글랜드의 디어필드와 세인트폴, 뉴욕의 트리니티 등은 초일류 고교로 실력으로 말하면 조야(朝野)의 모든 요직을 독점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인사는 능력위주로 이뤄지고 자신이 다닌 고교에 대한 애착은 모교에 대한 기부행위와 동창들끼리의 사적인 만남에 한정되는 것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이다.

정권이 바뀐 뒤 새 대통령이 측근들을 능력에 맞는 자리에 앉히는 것은 문제가 안된다. 정치의 세계에서 어느 정도의 스포일스 제도는 용납된다.

그러나 고교의 학연은 스포일스 제도가 아니라 그 이전의 원초적 본능이다.

원초적 감정이 합리정신으로 여과되지 않고 인사에 반영되는 사회는 절망적이다.金대통령은 이런 원초적 감정의 폐단을 더는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한 것이다.관련자들의 실천을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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