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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받는 지자체 예술 콘텐트 공동 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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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지난 수년간 마치 경쟁하듯 추진됐던 하나의 트렌드는 전국 지자체들의 문화예술회관 건립이었다. 경제적 풍요와 더불어 문화예술이 삶의 질 향상에 중요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데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각 지역마다 최첨단의 문화시설을 건립해 놓고도 정작 그 공간을 채울 콘텐트가 없어 외화내빈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의 경우 수많은 공연기획사들이 앞다퉈 신청하는 대관 공연이나 전시만 채우더라도 우수한 콘텐트가 넘쳐난다. 하지만 지방은 그럴듯한 작품의 대관 신청이 드문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지역 문화공간들은 자체 예산을 들여 검증된 콘텐트를 유치하거나 소규모 단위로 작품을 자체 제작하는 것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이 과정에서 항상 예산부족에 시달렸다.

그런데 최근 지역 문화예술 공간들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겨나고 있다. 문화시설들 간에 서로 별 차이가 없는 작품들을 유치하려고 경쟁하지 않고, 여러 기관이 예산을 십시일반으로 투자해 문화예술 콘텐트를 공동 제작하는 것이다. 기본적이면서도 상식적인 협력과 상생의 논리를 직접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노력으로 거둔 성과는 주목할 만하다. 2006년 고양문화재단은 수도권에 있는 다른 공연장들과 함께 오페라 ‘나비부인’을 공동 제작했다. 이후 2008년과 2009년에 대전문화예술의전당과 공동으로 오페라 ‘토스카’와 연극 ‘오셀로’를 만들었다. 또 대구오페라하우스까지 3개 기관이 힘을 합쳐 오페라 ‘사랑의 묘약’을 제작했다. 한 문화예술이론가는 최근의 이러한 현상을 주식시장에 빗대 “과거의 주도주가 서울이라면 지금은 지방이 떠오르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공동 제작은 우선 경제적 효과가 매우 크다. 여럿이 참여하기 때문에 예산부담이 줄어들고 공연 횟수도 참여기관의 수만큼 늘어나 새로운 고용창출의 효과를 낳는다. 공연할 때 해당 도시의 예술가를 캐스팅하는 방식이므로 지역예술가를 발굴·육성할 수도 있다.

공동 제작은 홍보와 마케팅에서도 시너지가 발생한다. 요즘 들어 관련 제작발표회마다 언론과 문화계가 관심의 차원을 넘어 응원을 하고 있다. 주목을 못 받던 지역 문화예술기관들이 중앙일간지 문화면에 비중 있게 다뤄지고 기관의 인지도도 높아지고 있다. 더불어 각 기관의 기획 인력들이 업무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자신들이 직접 아이템을 결정하고, 캐스팅 섭외의 주축이 되면서 예술행정 능력이 탁월해지는 것이다. 그 결과 국내 문화예술인력 인프라 향상이 이루어진다.

어려운 시기에 공동 제작은 지역공연장들에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 주고 미래 운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그리고 예술에서 협력은 아주 오래된, 그러면서도 늘 새로운 상생의 패러다임이다.

조석준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