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은행장 또 관선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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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금융권의 경영자율은 요원한 꿈인가. 국민은행장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정부-국민은행간 갈등을 보면서 정부의 구태(舊態)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송달호(宋達鎬) 전 행장의 사퇴로 공석이 된 후임 국민은행장을 뽑는 과정에서 금융감독위원회가 '경영자선정위원회' 란 의외의 카드를 들고 나왔다.

기존 은행장추천위원회 대신 외부인사로 선정위를 구성한 뒤 인력알선 업체에서 후보를 추천받아 뽑도록 하겠다는 것이다.'비상임 이사로 구성된 행장추천위가 객관성을 잃을 수 있기 때문' 이라는 것이 금감위의 공식 설명이다. 이에 국민은행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물론 은행이 무조건 내부 인사를 승진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란 금감위 주장도 일리는 있다. 그동안 많은 은행에서 능력보다는 정치권 줄대기와 나눠먹기식 인사가 수없이 단행됐고, 이로 인한 경영 부실은 경제 파탄과 국민 희생으로 이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이 있다고 해서 정부가 자의적으로 편법을 남발하는 것은 용인될 수 없다. 더군다나 그 의도가 정부 인사를 앉히기 위한 것이라면 말도 안되는 얘기다. 게다가 정부 방침은 절차상으로도 하자가 있다.

현행 제도상 은행장은 행장추천위와 이사회.주총 등을 거쳐 선임토록 돼 있다. 이 제도는 정부가 만든 것이다.

물론 여기도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정부가 앞장서서 이를 무시하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금감위는 조흥은행의 예를 들어 경영자선정위의 선례가 있다지만 경우가 다르다.

조흥은행은 정부가 압도적인 1대 주주지만 국민은행은 정부 지분이 6.47%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이사회나 주총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대변인이 나서서 행장 선임방식을 일방적으로 수정.발표한 금감위의 태도는 오만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정부의 은행권 인사개입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내부 승진에 문제가 있다면 주요 주주로서 적극적인 의사를 개진하거나 재선임을 요구하는 등 절차를 무시하지 않는 방법도 있지 않은가. 만의 하나 경영자선정위를 밀어붙일 경우라도 금감위 인사를 앉혀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국민은행 사태를 주목하는 또다른 이유는 이것이 조만간 단행될 금융권 주총과 임원 인사의 신호탄이 되기 때문이다. 금융권에 대한 낙하산 인사의 심각성은 도를 넘은 상태다. 웬만한 곳에는 재경부나 금감원.한은 인사가 포진하고 있다.

최근에는 특정지역 인사의 편중 발탁까지 겹치면서 금융권은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우리 경제의 최대 현안 중 하나인 금융개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또 인사쇄신 없는 금융개혁은 무의미하다는 점에서 정부의 파행 인사 중단을 거듭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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