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2000] 혼자서 영화 만들날 멀잖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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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금 우리는 '또 다른 르네상스' 를 겪고 있는 것 같다.

작사.작곡부터 시작해 음반제작의 전 공정을 혼자 힘으로 해치웠다는 가수 조PD는 '르네상스 맨' 의 전형이다.

중세의 어둠을 걷고 인간과 세계를 새롭게 발견했다는 서양의 르네상스시대처럼 우리도 이전 시대에 꿈도 꾸지 못했던 일들을 지금 '디지털' 이란 새로운 기술에 힘입어 이룩하고 있는 것이다.

책도 공장이나 출판사가 아니라 혼자 집에서 만들 수 있게 됐다. 디지털 카메라 한 대만 있으면 할리우드의 거대한 조직이 아니라 단 한명의 힘으로 영화까지 제작할 수 있는 날도 멀지 않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 인물인 알베르티는 "인간은 자기가 하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재능있는 건축가이자 고전학자.시인.수학자였고 마술(馬術)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 시대를 평한 그의 말은 우리 시대의 정신적 분위기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낮에는 평범한 직장인인 아무개씨도 밤에는 통신공간의 작가가 되고 바흐에 대해 전 세계의 모든 정보를 꿰차고 있는 음악 전문가도 될 수 있다. 유럽의 르네상스기처럼 스티브 잡스.제리 양 등 시대의 천재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또 클리코크라시(click-ocracy). '닷컴' 등 하루가 멀다하고 온갖 신조어가 쏟아진다. 그것도 매킨토시 컴퓨터처럼 아무도 모르는 허름한 과수원 창고에서, 또는 아마존처럼 그저 누추한 건물 한구석에서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앞으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기술자나 전문가가 아니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진정한 르네상스 맨이다.

디지털 카메라처럼 날로 완벽해지고 있는 기술은 인간은 자기가 하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혁명은 동시에 인간이 아무 것도 아니게 만드는 역설적 힘도 함께 갖고 있다. 네티즌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섹티즌' 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기술이나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기계가 갖출 수 없는 유일한 재능인 종합적 상상력을 이용,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 새로운 세계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요구된다. 그것이 새로운 르네상스 맨이 구비해야 할 자질이다.

조형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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