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기업이 잘되는 이유] 정보는 나누고 윤리는 철저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1998년 1월 현대.삼성 등 국내 5대 재벌총수들은 청와대에 들어가 재벌개혁에 협조하기로 약속하면서 경영 투명성 향상을 가장 앞에 내놓았다.

그룹총수와 측근들에 의해 경영이 좌우되는 '기업통치' 방식을 고치고 불법.탈법적인 경영 관행을 바로잡겠다는 게 골자였다.

그러나 대기업과 거래하는 국내 외국계 기업 관계자들은 "경영투명성은 다소 높아졌지만 여전히 미흡한 수준" 이라고 입을 모은다. 아직 한국기업에는 규칙보다 관행과 인간관계가 우선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외국기업들은 최고경영자와 말단 직원들이 경영정보를 공유해 일부 임직원들의 독단 경영을 사전에 차단하고 자체 윤리규정을 철저히 지킨다. '안팎으로' 투명한 경영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폴 맥고너글 주한미상공회의소(AMCHAM)회장 겸 뱅크 원 한국 지사장은 외부초청 강연에 나가 받는 사례금을 모두 자선단체에 기부한다.

회사 임직원이 대외적인 활동으로 수익을 얻으면 일정액을 반드시 사회에 환원하도록 한 사규에 따른 것이다.

지게차 생산업체인 클라크 머터리얼 핸들링 아시아는 창원공장과 서울사무실에서 매달 전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경영진들로부터 지난달의 매출실적을 비롯한 경영전반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캐빈 M 리어든 클라크 사장은 "경영정보를 빠짐없이 전직원에게 알려 회사에 대한 직원들의 신뢰도를 높이고 비자금 조성과 같은 불투명한 경영행태를 사전에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고 설명했다.

국내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별다른 간섭없이 상당한 금액을 자유롭게 쓰는 것과는 달리 외국기업은 비용과 지출을 상호 체크하고 영수증을 철저히 챙긴다.

토니 헬샴 볼보건설기계코리아 사장은 판공비 등 모든 지출을 '부하 직원' 인 재무담당이사(CFO)에게 사용처를 사전에 보고하고 결제를 받은 뒤에야 쓴다.

비자 코리아는 아예 회계와 자금업무를 안진회계법인에 아웃소싱해 월급은 물론 간식 구입비까지 안진에서 타쓴다.

외국계 기업들은 극히 민감한 사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정보를 사내에 공개한다. 볼보건설기계코리아는 사장과 재무.인사 담당 이사들이 한달에 한번씩 여는 임원회의의 논의 결과를 사내 e-메일과 게시판을 통해 알려준다.

미국 컴퓨터어소씨에이트(CA)와 코오롱이 합작한 시스템 통합업체(SI) 라이거시스템즈는 최근 '프로젝트 관리 지침' 을 마련했다.

프로젝트 수주와 관련한 정보수집 단계는 물론 입찰.프로젝트 개발완료 등 전과정을 사내 누구라도 언제 어느 때나 열람할 수 있도록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다.

덤핑.저가(低價)수주 등 '진흙탕 싸움' 이 일상화한 국내 입찰관행의 실정상 자사직원들 역시 불법.탈법 동원이 불가피하자 원천적으로 이를 막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직원들이 저가 수주 등 편법으로 수주에 나설 경우 오히려 회사에 손해가 난다" 며 "눈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회사의 중장기적 발전을 가로막는 탈법.불법은 용납하기 힘들다" 고 밝혔다.

세계적 생활용품사인 피앤지(P&G)역시 납품업체로부터 일절 대접을 받지 못하게 돼 있다. 특히 대행사 및 납품업체 선정 등 기업 차원에서 내리는 결정은 모두 공개경쟁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특히 임직원들이 비용을 지출할 경우 영수증은 물론, 언제 누구와 어떤 이유로 사용했는지 그 내역을 반드시 첨부해야 한다.

월마트 코리아는 거래업체와의 접촉에서 돈이나 상품.초대권, 여행이나 식사 초대, 제품 샘플까지도 금품수수로 분류해 놓았다.

받지 말아야 할 선물과 향응, 접대 유형을 세밀하게 규정해 직원들이 헷갈리지 않고 거절할 수 있도록 원칙을 정한 것이다.

리바이스 코리아도 직원들이 미화로 25달러 이상의 현금이나 선물을 받지 못하도록 사규로 명시,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즉각 해고해 버린다.

그러나 외국기업들도 한국기업들과 거래를 할 때 지나치게 '투명 경영' 을 고집하다가 손해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호소한다.

한 미국계 기업의 지사장은 "한국에는 정당한 로비의 개념이 희박한데다 본사에서 접대 등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어 공무원 등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는 일이 가장 힘들다" 고 꼬집었다.

표재용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