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시대…교양의 틀이 바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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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교양의 내용이 바뀌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념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흔히 교양이라면 역사.철학.문학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이 주류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지고 있다. 경제.경영이나 자연과학.외국어 등 예전에 낯설게만 느껴졌던 분야들이 디지털 경제를 축으로 하는 사회변화에 힘입어 이제는 교양의 새로운 근간으로 등장하고 있다.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집계를 보면 그 경향은 뚜렷하다. 최근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순위 20권에는 '빌게이츠@생각의 속도' (청림출판). '나는 사이버주식 투자로 16억원을 벌었다' (국일증권경제연구소).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황금가지) 등 경제.경영.컴퓨터 관련서가 무려 7권이 포함돼 있다.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지난해 7월 출간된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 (사회평론)는 영어공부법을 알려주는 서적으로 최근 교보문고.종로서적.대한출협 등에서 아직도 종합 순위 1위에 올라 있으며 지금까지 30만부 이상이 팔려나갔다.

이런 추세에 힘입어 실용서 시장이 확대.세분화하고 있다. 한 예로 건강서 가운데 인기가 높은 뇌관련이 서적은 30종이 넘게 선보이고 있다.

그 중 하루야마 시게오의 '뇌내 혁명' (사람과 책), 이승헌의 '뇌호흡' (한문화)이 각 서점 건강부문 베스트셀러에서 올라 있고 최근 나고르느이의 '뇌체조' (인동)가 속속 출간되는 등 앞으로도 늘어날 추세다.

주식투자 관련 책이나 컴퓨터 배우기 같은 책은 종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책에서 문학이나 역사에 관한 담론을 얻으려 하기보다 당장 생활 속에서 도움이 되는 책을 선호하는 것이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현대인들은 역사나 철학에 대한 관심이 많이 식었다. 사람들의 의식이 선악(善惡)의 개념을 중시하던 시대에서 재미와 실용을 요구하는 시대로 넘어왔다. 그 결과 경제적.과학적 교양으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고 설명한다.

이에 따라 서점도 변하고 있다. 을지서적의 경우 지난 1월부터 베스트셀러 분류표에서 경제.경영과 주식을 아예 분리했다. 주식베스트가 따로 생긴 것이다.

을지서적측은 "이 분야의 수요가 너무 많아 따로 정보를 전달하자는 뜻" 이라고 설명한다. 교보문고 역시 재테크 베스트셀러를 경제.경영에서 분리시킨다는 계획이다. 주식 뿐 아니라 부동산.금융 관련서도 포함한 새 베스트셀러 장르를 만든다는 것이다.

출판사의 전략도 변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오히려 비소설로 분류할 책이라도 경제.경영적인 요소가 들어있다면 경제.경영서로 분류해 판매전략을 세운다.

대표적인 경우가 변화관리전문가 구본형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 (생각의 나무)이다. 이 책은 경제개념을 바탕으로 '변해야 한다' 는 점을 강조한 에세이지만 저자의 인문학적 글쓰기에다 역사.철학의 예를 많이 들어가 인문서로 분류해도 무난했다.

그러나 출판사는 경제.경영부분을 택했다. 그 결과 7만 부 이상이 나가는 성공을 거뒀다.

반면 과거 교양의 중심부를 차지했던 소설이나 인문학서는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

대부분 대형서점 소설부문 베스트셀러의 경우 한 주에 판매부수가 1백부에 못미쳐도 10위권 진입이 무난하다.

반면 비소설 분야 10위에 들려면 2백부는 훨씬 넘어야한다. 동국대 홍윤기(철학)교수는 "경제.경영 등 실용서가 대두하고 철학이나 문학분야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인문학의 인간상이 실제 인간상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며 "이럴 때일수록 인문학분야의 지식인들이 현대인의 활동상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실용서 팽창이 가져다준 문제점을 지적해야 할 것" 이라고 말한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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