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생색만 낸 신용불량자 구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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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부가 차라리 생색이나 내지 않았다면 덜 억울하겠어요. " 중소 제조업체 총무과장으로 일하는 김모(36)씨. 2년 전 외환위기 여파로 회사 봉급이 밀리면서 대출금 이자를 제때 갚지 못했다가 신용불량자로 덜컥 낙인이 찍혔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당정(黨政)이 '밀레니엄 대사면' 의 일환으로 신용불량자 2백30만명 사면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드디어 지난 1월 16일 은행연합회가 소액 대출금 및 카드대금 연체자들의 신용불량 전산기록을 일괄 삭제했다는 희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다음날 기쁜 마음으로 은행창구를 찾은 金씨에겐 "신용불량 기록이 삭제됐지만 당신은 우리 은행이 자체 평가한 신용등급이 좋지 않아 신용카드를 다시 발급해줄 수 없다" 는 직원의 대답을 들었다.

낙담한 金씨를 다시 한번 울린 것은 관련당국의 태도였다.

金씨와 비슷한 일을 겪은 수십만명의 민원이 폭주하자 정부는 최근 금융감독위원회와 은행연합회를 비롯한 각 금융단체에 상담전화를 마련, 철저히 대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며칠간 상담전화를 일일이 걸어본 金씨에게 돌아온 답변은 "신용불량 기록이 삭제됐어도 개별 금융기관이 신용평가에 따라 거래를 다시 트지 않는 것을 금지할 법적 근거가 없다. 그래도 최대한 '선처' 해주도록 정부가 행정지도를 펴고 있으니 기다려달라" 는 소리였다.

"정부가 신용불량 기록만 삭제되면 당장에 정상적으로 금융거래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선전했지만 달라진 건 하나도 없습니다. 차라리 기대를 하지 않았으면 마음이나 편했을텐데…. " '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애당초 신용불량자 사면조치는 당사자인 은행들의 의견을 철저히 무시한 채 당정이 밀어붙인 선심성 정책" 이라고 지적했다.

외환위기로 망할 처지에 놓인 은행들을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해 살려놓는 과정에서 정부는 서구식 신용거래시스템을 갖춰야 살아남는다고 누누이 강조해왔다.

그런 정부가 이제와서 "신용이 안좋아서 거래 못하겠다" 는 은행들에 "그래도 대출해줘라" 고 강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신용불량자 사면 발표로 정부는 생색을 냈지만, 피해는 정부 발표만 철석같이 믿었던 금융기관 고객들의 몫으로 남을 전망이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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