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의 시시각각

장관의 맥 빠진 리더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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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섀클턴은 결코 성공한 탐험가가 아니었다. 1909년 남위 88도23분, 그때까지 자연이 허락한 최남단에 도달했지만 남극점 정복은 2년 뒤 아문센에게 양보해야 했다. 아문센과 경쟁하던 스콧이 조난사하자 섀클턴은 1914년 남극 횡단에 재도전한다. 하지만 빙산에 부딪쳐 엘리펀트섬에 표류하고 말았다. 추위와 굶주림,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섀클턴은 무모하지만 단호한 결정을 내린다. 소형 보트를 저어 1300㎞나 떨어진 사우스조지아섬 포경기지에 구조를 요청키로 한 것이다. 백고천난 끝에 사우스조지아에 도착했지만 기지와는 정반대 쪽이었고 섀클턴은 다시 맨몸으로 50㎞의 얼음계곡을 넘어 기지에 도착한다. 구조선을 이끌고 엘리펀트섬에 남아있던 22명의 대원을 모두 구조했음은 물론이다. 비록 횡단은 실패했어도 500일 동안 남극의 어둠과 추위를 뚫고 부빙(浮氷)을 걸어 한 명의 희생자 없이 전 대원을 고국 땅에 내려 놓은 것이다.

한 번도 남극점을 밟아본 적 없는 섀클턴이 전설적 영웅이 된 것은 그런 불굴의 지도력 덕분이었다. 아문센과 스콧·섀클턴 모두와 탐험한 적 있는 지질학자 레이먼드 프리슬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과학적 리더십이 필요하면 스콧을 부르고 신속한 정복을 바란다면 아문센을 불러라. 하지만 절망적 상황에서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섀클턴을 보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섀클턴 리더십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건 그를 인용하기도 민망한 우리의 리더들 얘기를 하기 위함이다. 행정구역 통합만이 살 길이라 외치며 기세 좋게 치고 나갈 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주민의견 조사에서 여러 가지 무리가 따랐을 때도 그만한 과단성 없이 그토록 이해관계가 엇갈린 일을 어찌 처리하겠나 싶어 지지를 거두지 않았다. 자율통합 대상이 3분의 1로 줄었지만 그래도 통합의 불씨를 지필 수 있겠다 싶어 안도했었다. 사실 그보다는 집권 여당 원내대표의 선거구가 걸린 문제를 밀고 나가는 뚝심의 리더십을 믿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변고가 있나. 주무 장관이라는 사람이 이틀 만에 국회에 불려와서 한다는 소리가 “(의원님들이 문제 삼는) 2곳은 실질적으로 통합에서 제외된다”는 거였다. 행안부 실무자들까지 경악시킨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이미 다른 곳을 달리고 있던 그들의 속셈이 짚였다. 향후 100년을 가늠할 국가 개조 작업을 진두지휘할 장관이나, 그것을 뒷받침해야 할 집권당 의원 나리들이나 애초부터 통합에는 관심이 없었던 거다. 그러니 4곳은 모양이 빠지고 6곳 정도는 돼야 뭐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얄팍한 계산이 나올 수 있었던 거다. 그렇게 구색을 갖춰 놓으면 지방의회가 알아서 거부해줄 테고, 그게 안 돼도 주민투표에서 통과되기 어려운데 무슨 걱정이냐는 거였다. 이제 장관은 할 만큼 했고 행정구역 개편 문제는 또 다시 미결과제로 구천을 떠돌면 그만이었다.

억울한 건 주민들뿐이다. 그것도 모르고 찬성이니 반대니 지역끼리 싸우고 이웃끼리 다투다 의만 상했다. 그 상처가 보였다면 장관은 안상수 대표의 모순된 논리를 뒤집었어야 했다. 행정구역이 바뀌면 달라지는 게 선거구지 선거구에 따라 행정구역이 움직일 순 없는 게 진리라고 말이다. 1921년 섀클턴은 마지막이 될 남극 탐험 길에 나선다. 사우스조지아에 도착한 그는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조국으로 운구되던 그의 시신은 부인의 뜻에 따라 사우스조지아에 묻혔다. 인생을 걸었던 곳에 묻힌 그는 행복한 리더였다. 이달곤 장관은 조용히 자리에서 내려오는 게 낫지 않을까. 이미 리더로서 인생을 걸 만한 승부처에 묻힐 준비도 의지도 없었다는 게 드러났으니 말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