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그러나 추운 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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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올림픽에서 여자 핸드볼이 은메달을 딴 것은 음지에서 핀 꽃이라 할 만하다. 온 시민의 사랑을 받는 강원도 삼척의 경우는 아주 드문 예외다. 어린 선수들은 장래를 걱정하고 팀 임원들은 경기력 향상보다 살림에 신경쓰기 일쑤다. 실정이 이렇다 보니 핸드볼인들 사이엔 웃지도 울지도 못할 남루한 '전설'들이 넘쳐난다.

■ "TV 다 거둬!"

지난해 실업리그가 열린 경기도 의정부시. 한 여자 실업팀이 경비를 줄이려 역 부근 모텔에 짐을 풀었다. 문제는 이곳이 이른바 '러브 호텔'이었던 것이다. 방에 들어선 스무살을 갓 넘긴, 때묻지 않은 여자 선수들은 생전 처음 본 물침대에 기겁을 했다. 게다가 밤이 되자 선수들이 이상야릇한 '에로물'이 방영되는 TV 앞에 삼삼오오 모여 마냥 수군대는 것 아닌가. 부랴부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감독은 각 방을 돌며 '어서 불 끄고 자라'고 지시했지만 불안감을 씻을 수 없었다. 결국 밤 12시쯤 각방의 TV를 몽땅 수거해 들였다. 8개의 TV를 방에 쌓아 두고서야 감독은 편히 잠들 수 있었다고.

■ 감독님은 요리사

2001년 세계 주니어 여자선수권대회가 열린 헝가리. 당시 20세 이하 청소년대표팀을 이끌고 간 강태구(부산시체육회) 감독이 대회 중반을 지나면서 아침마다 하는 일은 '장보기'였다. 서양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미리 라면.쌀.고추장 등을 준비해 갔지만 일주일 만에 동이 난 것. 임원이라곤 단장.감독.코치 달랑 세명뿐이니 코치에게 아침 훈련을 지시하고 강감독은 직접 장을 봐야 했다. 저녁에도 훈련으로 지칠 대로 지친 선수들을 챙기기 위해 밥짓고, 라면 끓여주는 일은 강감독과 코치의 몫이었다. 청소년이라도 태극마크를 단 대표팀 아닌가. "축구처럼 전담 요리사에 피지컬.심리 트레이너를 데리고 가는 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그래도 내가 감독인지 요리사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지금도 헛웃음 짓는 강 감독의 회고다.

■ 정민태 연봉이면…

여자 핸드볼 최고 연봉 선수는 허순영(대구시청).허영숙(부산시체육회).오영란(효명건설) 등 최고참들. 3000만원을 간신히 웃도는 수준이다. 남자 최고 연봉은 이보다 200만 ~ 300만원 더 적다. 실업팀 근무연수가 여자 선수들보다 짧기 때문이다. 선수 연봉.훈련비.대회 출전비.피복비.부식비 등을 모두 합쳐도 한팀 1년 예산은 6억원을 넘지 못한다. "아무리 프로 스포츠지만 야구의 최고액 연봉 선수(정민태.7억4000만원)에 들 돈이면 핸드볼팀 하나는 꾸리고도 남는데…." 핸드볼인들의 자조 섞인 한탄이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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