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판 10년세도 맞선 '신예 쿠데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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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4인방' 이 연초부터 수난을 겪고있다. 이창호9단이 루이나이웨이(芮乃偉)9단의 치마폭에 빠지더니 유창혁9단과 서봉수9단마저 경력이 까마득한 신인들에게 덜미를 잡혔다.

조훈현9단 말고는 전부가 삐걱거린다. 90년대 한국바둑을 휩쓴 4인방은 지난해에도 상금랭킹 1~4위를 점령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그 강고한 10년 세도가 올해는 드디어 변하려나.'바꿔' 를 맨 먼저 외치고 나선 화제의 주인공은 원성진2단과 유재형3단이다.

강남의 압구정동에 사는 원성진은 1985년생이니까 올해 겨우 15세. 충암중 2학년이고 98년에 프로가 된 솜털이 보송보송한 새내기다. 작으마한 키에 언제나 웃는 얼굴이어서 승부사라기보다 동자불(童子佛)같은 인상을 준다.

원2단은 그러나 지난달 26일 한국기원에서 벌어진 왕위전 본선 개막전에서 백을 들고 거함 유창혁9단을 168수만에 불계로 침몰시키며 빛나는 첫승을 거뒀다.

예선전 6연승으로 본선의 관문을 통과한 것만 해도 놀라운데 막강한 실력자를 첫판에 날려버린 것이다. 지난해 왕위 타이틀에 도전했다가 이창호9단에게 2대3으로 패퇴한 유9단은 재기의 칼을 갈고 나섰다가 난데없는 복병에 일격을 얻어맞고 할 말을 잊었다.

원2단은 99년도 신예10걸전에서 결승까지 진출해 비록 우승은 놓쳤지만 이미 골치아픈 신예로 인정받고 있었다. 지난해 성적도 38승15패로 상위권.

왕위전 본선은 조훈현9단.서봉수9단.유창혁9단.양재호9단.윤현석5단.안조영5단.이세돌3단.원성진2단 등 8명이 풀 리그를 벌인다. 신구의 정예들이 반반씩 섞인 이곳에서도 가장 어린 원2단의 올해 활약이 주목된다.

유재형3단은 경남 김해 출생으로 올해 23세. 아버지가 하고 있는 서울 영등포의 명소 화랑기원에서 어려서부터 아마강자들과 단련한 실전파다. 키가 훌쩍 크고 사람이 좋아 겉모습은 자못 싱거워보이지만 이미 98년부터 다승 경쟁에서 선두를 다투곤 했다.

지난달 28일 유3단은 018배 패왕전에서 서봉수9단을 맞아 백을 들고 140수만에 가볍게 불계승을 거두고 당당 도전자결정전에 진출했다. 93년 프로가 된 이후 수많은 본선에 진출했으나 정상 부근에 이처럼 가까이 접근해본 것은 처음이다.

유3단의 상대자는 바둑 명가 조남철-조치훈 가문의 일원인 이성재5단. 오는 11일 단판으로 승부를 겨루며 승자는 타이틀보유자인 조훈현9단과 3번기를 벌이게 된다.

신예들은 많다. 신예 티를 벗은 김승준6단.최명훈7단은 제쳐놓더라도 이성재.안조영.목진석.조한승.이세돌.강지성.최철한.이희성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그 많은 신예들의 힘으로도 4인방이 버티는 정상을 치고 올라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젠 때가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었다. 올해는 원성진과 유재형이란 의외의 인물이 스타트를 끊은 것부터 기대를 부풀게 한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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