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 한반도에 美대선 약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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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북한과 미국 관계에 미국 대통령선거의 "약효" 가 나타나는 것인가. 지난해 10월 워싱턴에서 '틀림없이' 열릴 것 같던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연기를 거듭하다가 3월 중에는 '확실히' 열릴 전망이다.

한반도 평화회담 대표 찰스 카트먼은 지난해 10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일단 페리보고서의 문을 열고 들어오면 거기에 많은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워싱턴에서 고위급 회담이 열린다면 그것은 북한이 마침내 한국.미국.일본 세나라의 대북자세를 합치고 녹여서 만든 페리보고서의 포괄적 접근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북한문제가 지금의 교착상태를 타개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 회담은 한반도의 긴장완화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북.미 관계개선에는 큰 이정표가 될 것이다.

클린턴 정부는 1994년 제네바 핵합의를 통해서 어렵사리 북한의 핵개발을 동결시키고 지난해 9월에는 베를린에서 미사일 모라토리엄(시험발사 동결)의 합의를 받아내는 데 성공해 북한을 무력으로 응징할 수도 없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심각한 딜레마에서 일단은 벗어났다.

그러나 핵과 미사일에 관한 합의는 북.미관계가 국교정상화나, 적어도 연락사무소 설치 같은 획기적인 개선에 이르지 못하는 한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특히 미국의 국내정치와의 관계에서 11월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이 집권해 미국의 대북자세가 강경쪽으로 바뀐다면 북한으로서는 다시 핵과 미사일을 이용한 벼랑끝 외교를 펼칠 유혹에 빠질 것이다.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와, 공화당후보 가운데 선두주자인 조지 부시의 외교정책 브레인들의 북한에 대한 입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경하다. 스탠퍼드대 부총장에서 부시 선거본부로 옮긴 콘돌리자 라이스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녀는 포린 어페어스 2월호에 쓴 글에서 미국이 북한 같은 정권에는 '단호하고 확고한' 정책을 펴야 하는데 클린턴은 그러지를 못했다고 비판했다.

라이스는 전역(戰域)미사일 배치를 서둘러 북한이 대량 살상무기를 사용하면 그것은 곧 북한의 자멸(自滅)을 의미한다는 점을 인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화당계열의 또 한사람의 중요한 외교 전문가인 로버트 죌릭 전 국무차관은 더 무서운 말을 했다.

그는 포린 어페어스에서 공화당정부의 외교정책은 지구상에 아직도 미국과 미국의 이념에 반대하는 악(惡)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이념에 반대하는 나라를 악으로 규정한다면 그 악을 응징하는 데 무력사용을 주저할 것인가.

이런 입장들을 고려하면 북한이 고위급 회담을 더 미루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벼랑끝 외교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선결과는 예측불허의 상황이다. 앞으로 남은 1년동안에 줄 것은 주고 실리를 챙기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클린턴 정부의 고위 관리들은 미국의 외교정책은 국가이익을 추구하고, 국가이익은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에 따라서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화당이 집권해도 대북정책의 기조는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옳은 말이지만 북한과의 모든 합의는 외교스타일의 변화에도 흔들릴 만큼 취약한 게 문제다.

클린턴은 고어 부통령의 당선을 도와야 한다. 워싱턴에서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선거 이전에 미군유해가 돌아온다면 득표에 플러스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환상은 금물이다. 북.미, 북.일관계 개선이 남북관계 진전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북한이 외교적인 고립을 벗어나고 경제사정이 좋아질수록 오히려 북한이 대남관계를 개선해야 할 전술적인 동기는 줄어든다는 아이러니를 잊지 말자. 그렇다고 미국과 일본의 대북정책 추진속도를 조절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햇볕정책의 모순을 드러내는 일이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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