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 '바꿔 운동'만으론 미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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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이 일으킨 세찬 돌풍에도 '할테면 해봐라' 며 태연한 정치인들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영.호남.충청 지역구 출마 희망자들이다.

이들이 최우선적으로 신경 쓰는 건 변함없이 보스의 눈길이요 심기다.

시민단체들의 명단에 다소나마 신경을 쓰는 것은 혹시라도 공천경쟁에서 불리하게 작용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지 명단이 당락에까지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낙점' 이 확실할 만큼 이미 보스의 점수를 따두었거나 약속을 받아둔 정치인들은 시민단체들이 기세를 올려도 '명단에 백번 올려봐라' 며 코웃음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자만심이 어디서 오는지는 너무도 뻔하다.

우리 정치의 고질인 이른바 '지역감정' 혹은 '지역정서' 가 이번 선거에서도 예외없이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총선시민연대의 명단이 발표된 지난 24일 이후 부산.경남지역 시민단체에는 'YS계 죽이기에 나섰느냐' 'DJ와 여당 편만 들기냐' '왜 영남 출신에만 가혹하냐' 는 등 지역주의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전화가 꼬리를 물었다고 한다.

충청도에서도 자민련이나 시민단체에는 '청와대와 시민단체의 커넥션 아니냐' '이건 JP와 자민련 죽이기다' 라는 등의 전화가 잇따랐다고 한다.

여기에다가 자민련이 음모설을 공식적으로 제기하며 공세를 펴자 충청지역에서는 오히려 자민련의 지지도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호남이라고 가만 있겠는가.

그동안은 '이제는 호남이라고 해서 무조건 민주당 공천자를 찍는 건 아니다' 라는 분위기도 제법 형성돼 왔는데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쪽으로 정치판이 움직여가자 다시 '똘똘 뭉치기' 가 되살아날 조짐도 있다고 한다.

아직은 어디까지나 짐작 수준이다.

그런 짐작이 잘못된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판이 그런 쪽으로 흘러간다면 이건 정말 큰일이다.

모처럼 국민을 정치적 불신과 무관심, 그리고 냉소주의에서 벗어나게 한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은 찻잔속의 태풍으로 끝나버릴 것이다.

아무리 노회한 기성정치인들이 지역감정에 불을 질러도 여러 지역 출신들이 혼재한 서울 및 수도권 지역에서만은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이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실제로 시민단체들의 명단발표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정치인들은 서울 및 수도권지역 정치인들이다.

그러나 서울과 수도권 지역을 벗어나 생각해 보면 우려가 단순히 쓸데없는 걱정이지만은 않다는 생각이다.

현재의 추세라면 지방에서는 유권자들이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에 절대 공감하면서도 실제 투표는 지역주의에 근거하는 이중성을 보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한 호남지역인사는 자신의 지역구에 출마가 예정된 민주당 소속 정치인이 시민단체의 명단에도 들었고 자신의 마음에도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한나라당이나 자민련 후보를 찍을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또 야당후보에게서 자질면에서나 정책면에서나 차별성을 발견할 것 같지도 않다고 말했다.

이런 사정, 이런 투표성향은 충청에서도, 영남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민주당 후보가 영남이나 충청에서 과연 몇이나 당선될까. 한나라당이나 자민련 후보는 명단에 들었고 민주당 후보는 명단에 들지 않았다고 해서 영남이나 충청 유권자가 민주당 후보를 찍을 것인가.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은 의미있는 것이고 이미 큰 성과도 거두었지만 인물의 "바꿔" 에만 그쳐서는 안된다.

낙천.낙선운동에 찬성하면서도 투표에서는 무조건 지역연고 정당을 찍는 이중성을 막아야 한다.

그러려면 이제까지의 총론적 낙천.낙선운동을 각론적인 운동으로 바꿔야 한다.

연대는 그만하면 됐다.

지금부터는 전문시민단체마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각 후보, 각 정당의 국가적 과제나 사회적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를 부각시켜야 한다.

강고한 지역주의, 기성 정치판의 지역대결구도가 그런 노력만으로 간단히 타파될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낙천.낙선운동이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듯 뭉쳐진 시민의 힘은 또한번 뜻밖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유승삼 <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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