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는 변혁중] 1. 문화 대충돌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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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 사회가 크게 출렁이고 있습니다. 시민단체들의 낙선운동에서 촉발된 거대한 물결이 전 사회를 흔들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중앙일보는 우리 사회가 겪는 '또 다른 변화' 의 실체를 독자 여러분과 밝히기 위해 네차례의 전문가 발제에 이어 독자 여러분의 토론장을 마련하려 합니다. 의견이 있는 분은 팩스(02-751-5228)나 e-메일로 보내주시거나 게시판에 의견을 적어 주시기 바랍니다.

[발제 1]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다. '세계사적 권력이동' 을 배경으로 한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문화충돌 현상이다. 오랜 세월 한국의 정치권력을 지배해 왔던 지역주의라는 원시적 유대와 돈의 힘이 정보와 논리의 힘을 기반으로 한 시민사회의 도전에 직면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난 30여년간의 급속한 산업화를 경험한 데 이어 지식 정보화 사회로 이행하는 세기적 변화의 흐름에 몸을 실었다. 블루칼라 '산업역군' 이 경제활동인구의 다수파를 이루었던 시기는 이미 종식된 지 오래다.

1987년 6월항쟁의 '후위(後衛)' 역을 맡았던 사무직 노동자 집단이 능동적으로 지식 정보화의 조류에 적응해 들어가는 가운데 정보산업과 서비스산업 분야에서는 자유전문직이라는 새로운 직업집단이 빠른 속도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지난 24일의 대사건은 새로운 세기의 징후며 그 주력은 정보화에 눈뜬 사무직 노동자와 자유전문직 직업집단이다. 이들은 정치사회적 쟁점에 비판적.합리적으로 대응하며 자유롭고 개인적인 삶의 양식을 선호한다.

학력과 문화수준이 높고 나름의 전문적 시각과 견해를 가지고 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적 절차를 중시하고, 특정정당이나 정파를 무조건적으로 추종하지 않으며, 정당한 근거가 없는 권위에는 승복하지 않는다.

이들은 기술혁신과 경제적 진보, 자기책임과 사회정의, 인권과 환경보호를 실현할 수 있는 합리적 정책을 가진 정당을 원한다.참여연대와 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한 각종 시민단체에 가입하고, 후원금을 내고, 자원봉사를 하고, 적극적인 지지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오늘까지 우리 정치는 이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소외시켰다. 그것은 특정한 정치지도자가 향우회나 진배없는 사조직에 정당의 외피를 입혀 운영하는 '무늬만의 대의정치' 였고, 최소한의 토론조차 없이 내린 정치적 선택을 지도자의 '구국적 결단' 으로 치장하는 가부장(家父長)정치였다.

기업의 뒤를 봐주거나 특혜를 제공한 대가로 받은 검은 돈으로 지구당 조직을 돌리고 대중을 동원한 금권정치, 공동선과 사회적 합의를 위한 토론을 뒤로 한 채 만들어낸 기득권 나눠먹기를 '여야 합의' 로 포장하는 정치, 이 모든 불합리한 행태에 대한 시민사회의 도전과 저항을 실정법과 제도의 힘으로 억누른 정치가 주였다.

우리의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문화적 불일치는 이제 격렬한 충돌을 막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지금까지 폭발이 지연된 것은 시민사회가 정치권력에 도전하는 데 필요한 '장비' 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시민사회는 지역감정이라는 원시적 유대감과 검은 돈과 가부장적.권위주의적 정치문화에 맞서 싸우기에 충분한 인력을 보유하게 됐으며, 신뢰성있는 정치정보를 획득하고 유통시키는 데 필요한 통신수단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이 열어준 사이버 공간을 활용해 신문과 방송 등 정치권력과 복잡다단한 커넥션을 맺고 있는 기존언론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적인 공론의 장을 만들어냈다.

여야를 포함한 기성 정치권력에 대한 시민사회의 도전은 이제 막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둘 사이의 충돌이 어떤 양상으로 얼마나 강하게, 그리고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권력이동' 이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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