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3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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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35) 고진감래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 개발 작업은 두 부분으로 나눠 진행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았다.

핵심 부품인 레이저 거리측정기의 경우, 예상 외로 어려움이 많았다.

또 다른 주요 부품인 자동조준장치 개발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역시 경험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국방과학연구소(ADD) 레이저부 연구원들이 어렵사리 시험용 레이저 거리측정기를 한 대 만들었다.

그러나 추운 겨울 실외에서 시험작동을 해 보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ADD를 방문하는 외빈(外賓) 앞에서 성능 시험을 할 때마다 작동을 하지 않는 통에 망신을 당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다 외빈을 돌려 보내고 정작 다시 실내에서 시험을 해 보면 멀쩡하게 작동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는 처음에 그 원인을 몰라 몹시 애가 탔다.

그러나 거듭되는 실험 결과, 레이저 거리측정기 내부의 기계 부품이 기온이 떨어지면 수축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레이저 광선은 직선으로만 발사되는데 기계가 뒤틀리니 레이저가 아예 발사되지 않은 것이었다.

온도에 따라 기계가 팽창.수축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채 설계를 한 것이 문제였다.

시행착오는 탱크의 자동조준장치를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반복됐다.

개발 책임을 맡은 한국과학원(KAIS)의 박송배(朴松培.76.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교수는 KAIS 대학원생들로 팀을 구성, 조준장치 개발에 나섰다.

하지만 개발 첫 해인 1976년에는 수없이 실패를 거듭해야만 했다.

경험이 전무(全無)한 탓이었다.

우리 연구진은 독자 개발의 어려움을 새삼 실감했다.

그러나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실패를 거듭할 때마다 그 원인을 찾아내느라 밤새워 토론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나도 ADD와 KAIS를 오가며 작업을 독려했다.

연구가 눈에 띄게 진척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78년에 들어서였다.

ADD 레이저부의 이종민(李鍾旼.57.한국원자력연구소 미래원자력기술개발단 단장).김철중(金哲中.49.한국원자력연구소 양자광학기술개발팀장)연구원 등이 레이저 거리측정기의 핵심 부품인 레이저 발진부(發振部)를 완벽하게 설계.개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레이저 발진부란 무질서한 빛을 한 군데로 모아 일시에 한 방향을 향해 똑같은 파장(波長)으로 질서정연하게 보내는 장치를 말한다.

또 우리는 레이저 거리측정기에 들어 있는 기계 부품이 온도 변화에 따라 팽창.수축하는 현상도 말끔히 제거했다.

이와 함께 미국의 무기 제조회사인 레이시온社의 기술 지원을 받아 기존의 대형 레이저 거리측정기를 작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레이시온社의 기술 책임자인 화이트하우스 박사가 레이저를 일시에 나오게 하는 재료를 무료로 제공한 덕분이었다.

나에게 시험용 레이저 거리측정기를 헐값인 1만 달러에 넘겨준 데 이어 두번째로 결정적 도움을 준 셈이다.

한국에 무기를 팔아 먹을 속셈으로 베푼 호의이긴 했지만 매우 고마왔다.

한편 박송배 교수팀도 거의 같은 시기에 자동조준장치(마이크로 프로세서)를 개발해 냈다.

목표물이 위치한 거리가 전압으로 표시되면 전압에 따라 각도가 나오고, 그에 따라 탱크의 포신(砲身)이 자동적으로 목표물을 조준하는 장치였다.

1978년 말, 마침내 우리 연구진은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를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레이저 거리측정기는 개발착수 5년만이었고 조준장치는 3년만의 개가였다.

그때 마침 미국의 레이저 무기 제조회사인 휴즈 에어크래프트社에서 연락이 왔다.

글=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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