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칼럼] 낙선운동 보도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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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시민단체들이 정치개혁에 나섰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우리 사회가 새 천년의 원년을 출발시키는 방법으로서는 이보다 더 신선하고 의미 있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정치개혁을 정치권에 맡겨둘 수 없고, 기존의 공천제도나 선거풍토에 맡겨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백번도 더 경험한 국민이 마침내 권력의 주인으로서의 할 일을 하기 위해 개혁 전방에 나선 것이다.

시민단체란 이 국민적 개혁 요청을 대변하고 실천하는 시민사회 조직이다.

이 점에서 시민단체들의 결의에 찬 행동은 주권재민과 시민 참여정치라는 민주주의 정치의 기본원칙에 근거한 것으로 봐야 한다.

국내 유력지들이 이번 시민단체들의 행동을 취재.보도.논평하는 방식은 많은 점에서 '한국 언론의 문제' 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여러 견해를 지상에 반영하는 것은 공정보도를 위해 필요한 일이지만, 신문이 망각해선 안되는 것은 공정보도가 늘 사회적 이성에 근거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공정보도' 를 구실로 이를 테면 인종차별주의.파시즘.히틀러주의 같은 것에도 공평한 발언의 기회를 보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정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법치의 기본이다.

그러나 대다수 시민이 '부당' 하다고 판단하는 법에 대해서는 시민에게 불복종의 권리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실정법을 내세워 불복종의 권리를 '문제적' 인 것으로 일괄 처리하려는 관점은 옳지 않다.

다수 시민이 '왜' 불복종을 선언하는가, 불복의 대상이 된 법조항이 법의 이성을 따른 것인지를 따지는 것이 여론의 방향을 점검하고 주도하는 신문의 더 근본적인 자세일 것이다.

대의(大義)와 곁가지 문제들을 구분하는 것도 신문의 할 일이다.

시민단체들의 이번 행동이 갖는 참으로 중요한 의미는 우리 사회에서 이성의 공적 사용을 촉진하기 위한 운동이 시민사회에서 터져나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정치부패로 인해 많은 비용을 부담해온 나라의 사회적 갱신(更新)을 위해서는 극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일대 갱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

' 자연의 갱신은 내버려두어도 새 봄과 함께 오지만 사회 갱신은 내버려 두어서 될 문제가 아니다.

'

그 갱신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사회적 이성의 회복이며, 사회가 이성의 공적 사용능력을 발휘하는 일이다.

정치와 시장이 주도해온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시민사회의 시간이 도입되고 더구나 그 시간이 바로 그 사회갱신을 위한 이성의 공적 사용에 바쳐지는 시간이라는 것을 신문들은 알아야 한다.

시민단체들이 권력기구화하면 어쩌나, 실정법 위반이 아니냐, 집권당과 시민단체가 세력결집을 보이는 것이 아니냐 따위의 문제들로 시비를 거는 것은 지난 수년간 우리 사회에서 공공성.공익성.투명성.공정성.독립성 등의 원칙을 지키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 헌신적으로 활약해온 주요 시민단체들에 대한 모욕일 뿐 아니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사회적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는 좁은 안목의 소산이다.

지난 한해 시민사회의 성장에 어느 신문보다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비정부기구들의 중요성과 활약상을 보도해온 중앙일보가 이번 시민단체들의 낙천운동이 갖고있는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21세기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치적 명운은 시민사회의 건전한 성장 여부에 달려 있다.

이것이 한국 신문들이 지금 이 순간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문제의 중요성이고 대의이며 공론지의 인식 내용이어야 한다.

큰 문제와 작은 문제를 구분하고 사회발전을 위해 어떤 것이 선결 사안인지 의제 순서를 잡고 있지 못하다면 신문은 무엇인가.

공공성과 공익성에 봉헌된 시민단체들은 신문의 적이 아니며, 신문은 오히려 그런 시민단체들을 지지해줘야 한다.

시민단체 따로 있고 국민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도정일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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