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코세지의 '비상근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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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90년대 초의 뉴욕. 프랭크(니콜러스 케이지)는 변두리 웨스트사이드에 위치한 병원에서 일하는 구급요원이다. 심야에 일하는 그는 늘 심신이 지쳐있다. 그가 상대하는 환자는 주로 마약으로 죽어가는 사람, 총격전과 칼부림으로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람, 알콜에 중독돼 몸을 가누지 못하고 숨통이 끊어질 듯한 사람 등 사회 부적응자들이다.

심장마비로 죽어가는 노인을 병원으로 후송하던 날 프랭크는 노인의 딸 메리(페트리샤 아퀘트)와 가까워진다.

그녀로부터 얼마 전에 죽은 로즈라는 여자의 모습을 떠 올린 것이다. 밤거리의 매춘부였던 로즈가 사경을 헤맬 때 프랭크가 연락을 받고 달려갔지만 그녀는 끝내 회생하지 못한다. 자신의 잘못으로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한 프랭크는 이후 악몽에 시달린다.

그러나 메리로부터 정신적인 힘을 얻으면서 자신의 일에 더욱 헌신적으로 매달리고 마침내 로즈의 환영도 점차 사라진다.

'비상근무' 의 각본은 스코세지와 '택시드라이버' '분노의 주먹' 에서 손을 맞췄던 단짝 폴 슈레이더가 맡았다. "도시는 강자든 약자든 가리지 않고 모두를 죽여버린다" 는 등 슈레이더 특유의 이죽거리는 어투를 여기서도 만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택시드라이버' (1976년작)의 속편 같은 느낌을 준다. '택시드라이버' 에서 월남전 참전 군인이었던 트래비스(로버트 드 니로)가 어슬렁거리듯 택시를 몰며 뉴욕 뒷거리를 배회했다면 '비상근무' 에서 프랭크는 질주하며 뉴욕의 밤거리를 탐사한다.

트래비스가 한 매춘부(조디 포스터)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걸었다면 프랭크는 거리의 여자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려 정신적으로 고투한다.

25년의 시차가 스코세지 감독을 보다 관조적으로 만든 탓일까. '비상근무' 에는 '택시드라이버' 에서 보이는 치열함과 신랄함 대신 늘어지는 듯한 편안함의 분위기가 더 짙다. 실제로 슈레이더는 인터뷰에서 "우리는 '택시드라이버' 의 속편이 아니라 분위기는 유사하되 전혀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트래비스는 혼자가 되고 싶어하며 고독을 즐긴다. 그러나 프랭크는 누군가와 함께 하길 원한다. 훨씬 성숙한 인간의 모습을 추구하고 있는 것" 이라고 말했다. 스코세지도 "나를 포함해 드 니로와 슈레이더는 당시 30대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가정을 가졌고 어느 정도 인생에서 성공도 맛 본 인간들이 아니냐" 며 슈레이더의 말을 뒷받침해 주었다.

결국 '비상근무' 는 내적으로 분열증을 겪으면서도 순수하고 초월을 꿈꾸는, '죄와 벌' 의 라스콜리니코프 같은 트래비스의 성격은 약화시키는 대신 사랑으로 자신의 정신적 외상을 치유하는 보다 정신적인 세계를 부각시키고 있다.

'비상근무' 는 스코세지가 별다른 변주 없이 동어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타락한 도시를 버텨내는 사내들을 그린 '비열한 거리' '좋은 친구들' 같은 그의 영화를 좋아해 온 이라면 이번 작품에서도 여전히 행복감에 젖어 들 수 있을 것이다. 개봉 15일.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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