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2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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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26) 산 넘어 산

77년 6월 초순 어느날, 김성진(金聖鎭.69.전 과학기술처장관)국방과학연구소(ADD)부소장이 급히 나를 찾았다. 늘상 있는 일이었기에 나는 별다른 생각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그의 방에 들렀다.

그는 육사 11기로 60년대 초반 미국 일리노이대 대학원에서 함께 물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나와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나이도 나보다 두 살 많아 형제처럼 지냈다.

그러나 金부소장은 평소와 달리 왠지 얼굴이 굳어 있었다. 늘 웃는 낯으로 나를 대하곤 했는데 이날 따라 웃음기 마저 찾아볼 수 없었다. 뭔가 고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하기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말 문을 열었다.

"韓박사, 탄약개발부장을 좀 맡지. "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닌 밤 중에 홍두깨' 라더니 대체 이게 웬 뚱단지 같은 소리란 말인가.

지금 '레이저 거리측정기' 와 야시(夜視)장비 등 각종 레이저 무기들을 개발하느나 눈코 뜰 새가 없는 판국에 느닷없이 엉뚱한 부서를 맡으라니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사정을 몰라 줘도 너무 몰라 주는 것 같아 은근히 화가 났다.

나는 단호하게 "못맡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金부소장도 내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듯 평소 그답지 않게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자네가 꼭 맡아야 하네. 지금 국가의 무기체계가 흔들리는 판에 모른체만 할 수 있나. 자네가 아니면 맡을 사람이 없어!" 그의 말은, 75년 상반기 국내에서 벌컨포(砲)20문을 개발, 해군 쾌속정에 탑재(搭載).배치했으나 발사 도중 노리쇠가 파손되는 등 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국가 방위에 커다란 차질이 빚어졌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당시 청와대와 국방부는 이 문제로 매우 고심하고 있었다. 벌컨포는 70년대 우리나라 무기체계 중에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컨포는 ^구경(口徑) 20㎜ ^유효 사거리 1천2백~1천8백m ^분(分)당 발사속도 5백회로 1회 6발씩 모두 3천발을 발사할 수 있는 등 방어 능력이 뛰어났다.

예컨대, 음속(音速)보다 약간 느린 속도로 저공 비행하는 적의 전투기라도 벌컨포의 유효 사거리내에 들어오면 격추가 가능해 군 부대나 비행장, 해군 함정 등 중요 군사시설에는 모두 벌컨포를 배치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국내에서 자체 개발한 벌컨포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결국 청와대와 국방부는 협의 끝에 ADD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金부소장을 불러 '8천만원의 예산을 줄테니 빠른 시간내에 문제점을 찾아내라' 고 지시한 것이다. 金부소장은 고심끝에 그 해결사로 나를 지목한 셈이다.

그러나 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탄약개발부장을 맡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국산 벌컨포의 문제점을 찾아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독 만든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상부에서 그토록 신경을 쓰고 있는 점도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나는 여기에서 엉거주춤하다가는 자칫 덤터기를 쓸 수 있다고 판단해 계속 버티기로 마음 먹었다.

"부소장님, 아시다시피 저는 이론물리를 전공하지 않았습니까. 저에게는 레이저 분야가 적격입니다. 포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게 없습니다. 이번만은 제 입장을 좀 고려해 주십시오. "

그러나 金부소장은 전혀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문제만 해결해 놓고 다시 레이저쪽에 전념하면 되지 않나. 어디서부터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자네에게 맡기는 걸세. 명령이니 무조건 맡게. "

나는 '명령' 이란 말에 깜짝 놀랐다. 그는 직책상 내 직속상관이기는 했지만 단 둘이서 업무 얘기를 할 때는 아무런 스스럼이 없었다. 그런 표현을 쓴다는 것은 이미 결론을 내린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음을 직감했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한 가지 조건을 내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글=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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