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반상철녀'의 기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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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중국 여류기사 루이나이웨이(芮乃偉)가 한국에 온 것은 지난해 4월이다. 그녀는 1986년 이래 4년간 연속 중국 프로여성기전을 석권, 일찍부터 '중국의 마녀' 란 별명을 듣고 있었다.

1990년 모국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간 그녀는 92년 도쿄에서 열린 제2회 잉창치(應昌期)배 세계바둑대회에 출전, 4강에 올라 일대 돌풍을 일으켰다.

한국기단의 전관왕을 꿈꾸며 승승장구하던 천재 소년기사 이창호(李昌鎬)가 1회전에서 芮9단을 만나 맥없이 무너졌던 것도 그 대회 때 일이다.

한국기원 소속의 프로로 활동하면서 33승6패 승률 84.6%로 99년 승률부문 1위에 올랐던 芮9단이 새해 들어 열린 국수전 도전자 결정전에서 무적함대에 비유되는 이창호9단을 또다시 물리친 것은 하나의 사건임이 분명하다.

그녀는 應씨배에서 李9단을 이긴 것이 단순한 우연이나 운에 의한 것이 아님을 증명한 것이다. 주위에서 충격에 싸인 李9단의 앞날을 걱정하기 시작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바둑세계에서 여성기사가 남성 군웅(群雄)들을 딛고 우뚝 머리를 내민 건 芮9단이 처음이다. 바둑 종주국인 중국의 남북조시대 이래 2천년을 통틀어봐도 정상급 남성에 맞서 판을 휘잡아 본 여자는 없다.

바둑이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한국은 물론 궁중의 지원을 받아 공식성을 띠고 장장 4백년을 이어온 일본 바둑계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기라성 같은 바둑천재.바둑영웅들이 대를 이어가며 기계(棋界)를 풍미했지만 여성기사가 그들과 어깨를 겨룬 전례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가로 세로 19줄씩이 교차하는 3백61개의 점(點)을 두고 맞서는 반상전(盤上戰)의 격렬함이 여성이 감당하기엔 벅차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렇기도 할 것이다.

바둑이란 게임은 맞선 상대를 이겨야 하는 치열한 두뇌싸움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가장 적소라고 생각되는 점에다 돌을 나르려면 판단력이 보통 빨라가지곤 안된다. 거기다 전체적으로 멀리 넓게 판세를 읽어내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순간적인 승부욕 때문에 단기(短氣)로 내닫는 일도 자제해야만 상대방을 이길 수 있다.

바둑은 또 엄청난 체력을 요구한다. 특히 프로세계에선 꼿꼿한 정좌(正坐)자세로 몇시간 혹은 며칠씩이라도 버텨낼 수 있는 초인적 인내력과 체력이 필요하다.

여성으로선 뚫어내기 힘든 이런 불리(不利)를 극복하고 이제 芮9단은 '마녀' 에서 '반상의 철녀(鐵女)' 로 이름을 바꿨다. 그녀는 이달 중순 국수전에서 조훈현(曺薰鉉)9단과 제1국을 겨룬다.

"여성은 남성보다 한 수 아래" 라는 바둑계의 굳어진 통념을 芮9단이 깰 수 있을지 정말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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