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세상] 세번째 이야기 - 출근 길 버스에서 느낀 따뜻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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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버스 기사들이 불친절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출퇴근길이나 친구들과의 약속 때 버스를 자주 이용하는 시민 중 한 사람으로 이런 말에 공감을 했다. 하지만 얼마 전 출근 길에 훈훈한 모습을 보고 나선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그날 역시 평소와 마찬가지로 천안 종합터미널에서 2번 버스로 환승을 했다. 승객들이 내리고 타고 곧바로 버스가 출발했다. 하지만 5초도 채 지나지 않아 버스 안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한 할머니가 터미널 앞 정류장에서 내렸어야 했는데 안내방송을 듣지 못해 미처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 할머니는 벨을 누르지도 못하고 내리는 문 앞에서 “터미널 지났나? 아이고 이를 어째, 딸 아이 집에 가야 하는데, 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야 하는데…”라며 연신 혼자 말을 하시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손에는 큰 보따리 하나가 들려있었다. 할머니는 “늙으면 죽어야 돼”라며 스스로를 질책했다. 몇몇 승객들은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봤지만 누구 하나 어쩌지 못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버스 운전기사였다.

마침 버스가 신호에 걸려 교차로에 서게 됐다. 거울을 통해 이 모습을 지켜보던 운전기사에게 모든 사람들이 눈이 쏠렸다. 운전기사는 “아이 할머니 정류장에서 못 내리면 어떻게 해요” “여기서 내리면 다른 차 때문에 위험해요” “그러길래 (안내)방송 잘 들으셨어야죠”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이런 말이 오가면서 나는 ‘저 할머니 어쩌나, 버스 아저씨에게 혼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애써 상황을 외면했다.

하지만 잠시 뒤 내 생각과는 정 반대의 상황이 전개됐다. 기사 아저씨가 할머니를 앞 문 쪽으로 부르더니 “다른 차들이 오지 않을 때 내리세요. 급하게 내리면 큰 일 납니다”라고 말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할머니가 내리는 것을 도왔다. 버스 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무사히 인도로 건너갈 때까지 아저씨는 문을 닫지도 않고 쳐다봤다. 행여나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신호가 바뀌고 뒤 차들이 빨리 출발하라며 경적을 울려댔지만 기사 아저씨는 서두르지 않고 버스를 움직였다. 비록 할머니 때문에 시간이 늦고 뒤에 따르던 다른 차량들로부터 비난을 받긴 했지만 아저씨는 개의치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고 ‘아직 우리 주변엔 좋은 사람들이 많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요즘도 가끔씩 버스 때문에 화가 나면 시 홈페이지에 불만사항을 가득 쏟아 붓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날의 광경을 떠올리면 그 생각이 말끔히 사라진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당시의 광경을 자주 얘기하기도 한다. 그날 버스를 운전했던 아저씨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1707’번 버스라는 것은 또렷이 기억한다. 1707번 기사아저씨, 파이팅.

김지혜(천안시 두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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