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건달'정치 극복하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21세기와 20세기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일까. '새 천년' 을 맞이하면서 제기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미국 교과서에 등장하는 토끼와 거북의 새로운 우화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새로 각색된 이 우화에 따르면 낮잠에서 깨어난 토끼가 스노보드를 빌려타고 달려가 결국 거북을 이겼다는 것이다.

여기서 거북은 20세기의 상징이며 토끼는 21세기의 상징처럼 그려지고 있다.

20세기에는 느린 거북이라 하더라도 성실한 자세로 빠른 토끼를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낮잠을 자다가도 토끼가 스노보드를 타고 달리면 거북을 이긴다는 것이다.

거북은 느리지만 성실한 노력의 표상으로, 토끼는 튀는 비약과 모험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거북이 성실한 축적과 연속성의 상징이라면 토끼는 비약과 단절의 상징인 것이다.

이 우화의 묘사대로 사실 20세기는 성실한 축적을 통한 '따라잡기(catch-up)' 의 세기였다.

우리 나라와 같은 후발국도 자본과 기술의 축적을 통해 선발국 따라잡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세기였다.

하지만 21세기는 '튀는' 토끼의 비약과 모험이 없으면 성공하기 힘들게 됐다.

20세기 산업화시대에는 축적을 통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지만 21세기 정보화시대에는 이러한 축적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다.

토끼처럼 튀는 비약의 발상이 없이는 성공하기 힘들다.

자기소개도, 주식투자도, 정치지망도, 대학 입시도 튀지 않고서는 성공하기 힘들게된 오늘의 우리 세태가 이것을 방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튀기' 발상의 저변에는 이른바 '역사의 종언' 과 함께 몰려온 미국식 시장경제 원리의 전지구화 현상이 자리잡고 있다.

이미 10여년 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더불어 토끼식의 튀기 발상은 전지구적인 현상으로 확산돼 나갔다.

이러한 세기말적 전환은 18세기 말에도, 19세기 말에도 존재했었다.

18세기 말의 민족국가 탄생, 19세기 말의 사회주의 탄생의 그 결과였다면, 20세기 말의 변화는 역사와 문화를 초월한 전지구적인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파도를 몰고왔다.

우리도 결코 이러한 파도의 충격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19세기 말의 변화에 우리는 민족주의로 저항했지만 20세기 말의 변화에는 세계화로 동참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10여년간 글로벌리제이션의 시행착오 과정에서 토끼는 튀는 비약성과 건달성을 동시에 몰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우리는 국제화와 민주화의 과정에서 권력이 권위주의화되고 경제가 IMF위기로 치달았던 경험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튀는 토끼의 건달성과 도박성을 극복해야 하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게 됐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기치를 내건 김대중정부의 등장은 우리의 새로운 역사 시작에 중요한 전기를 제공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김대중정부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이념을 민주화 운동과 접목시키는 데 국정의 초점을 맞추었다.

이 결과 비약과 단절의 발상으로 IMF 위기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의 지평을 넓히는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비약적인 IMF위기의 극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튀는 토끼의 건달성으로 야기된 정치.경제.사회적 시련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2년간 우리는 침체와 좌절로부터의 비약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많은 건달들을 양산해낸 감이 없지 않다.

책임윤리도 전문소양도 갖추지 못한 채 튀는 경쟁을 일삼는 건달 정치인, 건달 대학총장, 건달 비즈니스맨, 그리고 건달 검찰들 때문에 국가의 권위는 도전받게 됐고 사회불신은 팽배해졌으며 교육기능은 혼선을 빚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새 천년에 우리에게 제기되는 첫번째의 과제는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튀기의 건달성을 극복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글로벌리제이션의 시행착오 과정에서 거북의 성실성이 밑받침되지 않는 토끼의 튀기가 거품으로 현실화됐다는 점을 배우게 됐던 것이다.

토끼의 건달성을 극복하는 작업은 정치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된다.

정치개혁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여야간에 진정한 세력균형을 이루는 일이다.

지역주의의 병폐도 극복돼야 하고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도 시정돼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민주주의의 요체는 권력과 반대세력간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일이다.

김대중 정부의 지난 2년간은 여야의 튀는 건달들 간에 벌어진 '밀어붙이기' 와 '악쓰기' 의 연속이었다.

정치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김대중 정부는 비약의 이념과 운동을 등에 업고 등장했다.

이제 전환기적 시행착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건달을 제거하고 비약의 이념과 운동을 제도화 시키는 작업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역주의와 학생운동을 축으로 맴돌던 우리정치가 이제 시민단체와 이익단체 중심의 정치로 변해가고 있다.

김대중 정부가 의도하지 않은 놀랄 만한 정치발전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발전들을 제도화하는 가장 빠른 첩경은 건달들에 의한 정치공작이 아니라 권력 내부의 비약적인 자체개혁인 것이다.

장달중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미국 UC버클리대 정치학 박사, 서강대 교수 거쳐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