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기고] 3중 혁명 시작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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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물병좌의 시대가 열린다고. 그래서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사람들이 수평적 인간관계를 맺는 문명이 제3, 4천년을 지배한다고. 후천개벽이 일어난다고도 했다.

양이 음을 눌렀던 전천(前天)시대가 끝나고 음양이 공생하는 후천(後天)시대가 열린다고 했다.

과학적인 예언자들도 많았다.

경제의 토대가 자본.계급.조직 같은 '바깥에 있는 것' 에서 문화.지식.감성처럼 '안에 있는 것' 으로 바뀐다고 했다.

사장님 밑에 단단하게 뭉쳤던 사람들이 유연 조직으로 쪼개지고, 궁극적으로는 개개인이 자기 삶의 사장이 되면서 임시적 프로젝트에 따라 유동적으로 결합할 것이라고 했다.

국가에 몰렸던 힘이 빠지면서 지구촌.지역.국가.지방이 제각기 독자성을 갖고 다층적으로 얽힌다고도 했다.

이런 예언들에 홀린 듯 수많은 기업과 공공조직과 개인들이 '비전' 이라는 혁신의 깃발을 내걸고 새 천년의 문턱에 들어섰다.

혼란스럽게 들리는 예언들의 요점은 의외로 간단하다.

힘과 부가 바깥에 보이는 것들에 있지 않고 만질 수 없는 내면에서 나온다는 것, 부드럽고 유연한 것이 단단하고 굳은 것보다 강해진다는 것, 없는 것이 있는 것의 근원이 된다는 것. 이는 마치 2000년 이전 석가.예수.노자의 얘기를 우리 시대의 과학적 주술로 되살리는 것처럼 들린다.

바깥의 것, 단단한 것, 있는 것에 기초했던 문명, 특히 4백여년 서구 근대문명의 철옹성이 무상한 시간의 물결을 따라 씻겨내려가기 시작했다.

안으로, 부드러움으로, 없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엄청난 파괴와 창조가 시작됐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혹은 참으로 행복하게도 그 파괴와 창조 한가운데서 새 천년을 맞는다.

그것은 3중혁명의 시작일 뿐이다.

우선 '바깥에서 안으로' 의 혁명이다.

고대국가로부터, 근대 유럽제국의 함대들, 그리고 20세기 말미 대우그룹의 세계경영론에 이르기까지 프런티어는 바깥에 있었다.

땅.물자.공장 등 밖으로 프런티어를 넓힐수록 권력과 부가 축적됐다.

그런데 갑자기 삶의 근거지에 물과 공기가 썩고,가정과 지역사회와 학교가 붕괴했다.

바깥으로 나갈수록 안이 파괴됐다.

물자와 거대공장과 중앙권력의 육중한 무게를 견디지 못한 사회는 지식과 문화와 감성으로 그 토대를 바꾸고 있다.

이제 프런티어는 우리의 생활 안, 우리의 마음 안으로 바뀌었다.

위험의 요소도 거기가 가장 크고, 잠재된 힘도 거기가 가장 크다.

'바깥은 안에서 만든 것' 이라는 동양 고래의 원리를 경영학.물리학, 그리고 일상의 용어로 재창조해야 한다.

무한대의 안쪽 프런티어를 개척하기 위해 교육.가정.기업.종교.정치는 지속적으로 파괴되고 창조돼야 한다.

다음은 '단단함에서 부드러움으로' 의 혁명이다.

이제까지 힘은 크고 강철 같은 조직과 운영원리에서 나왔다.

한국과 일본의 기업조직이 그랬고, 국가동원체계가 그러했고, 혁명철학이 그랬다.

바깥에 있는 것들을 조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안으로부터 터져나오는 다기하고 추상적인 힘들을 엮기 위해서는 사회조직뿐 아니라 사적인 인간관계까지도 딱딱한 위계조직에서 부드럽고 역동적인 네트워크로 변해야 한다.

부드러움은 훨씬 다양한 자원을 농도 짙게 결합하면서도 내면의 자발성까지 품어 안을 수 있다.

네트워크의 핵심은 고도의 신뢰다.

이제까지 불신은 규율과 훈육, 견제와 균형의 이름으로 사회를 조직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자원을 부드럽게 결합하기 위해서는 '믿는 법' 을 배워야 한다.

20세기에 한국인들이 겪은 상처를 내면 깊은 곳에서 치유하지 않고는 신뢰의 무한자원을 가질 수 없다.

마지막으로 '있는 것에서 없는 것으로' 의 혁명이다.

20세기 물리학은 '없는 것' 이 '있는 것' 의 인프라라고 선언했다.

지식경제의 기반인 지식.문화.감성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혼돈' 으로부터 발생한다.

새로운 사회원리인 신뢰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 없는 것 속에서 있는 것을 예감하고 몸을 던지는 믿음과 모험…. 새 천년은 그런 전사들에 의해 창조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창조적 전사들 덕분에 삶을 향상시킬 수 있다.

우리 안의 전사들과 그 전사를 키우는 가정에 새 천년 내내 행운이 함께 하기를!

김용호

▶ 서울대 철학과.서강대 대학원 졸(언론학박사).패러다임 전환학.성공회대 교수

▶ 저서: '와우' '몸으로 생각한다' '문화폭발과 문화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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