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시향 그리고 임헌정, 이 끈끈한‘동지 관계’2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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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자양분 삼아 성장했다”는 임헌정씨에겐 여전히 휴대전화가 없다. 그가 대학 연구실에서 지휘하는 자세를 잡았다. 그에게 연구실은 외부와 단절된 채 음악에 파묻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강정현 기자]

1960년대 중반 충북 청주의 작은 교회. 찬송가 반주를 도맡아 하는 한 소년이 있었다. 악보가 있는 듯 없는 듯, 찬송가의 음을 높이거나 낮춰 부르는 목사에 맞춰 그때그때 풍금 조성(調聲)을 바꿔 반주하는 재주가 있는 아이였다. 그는 고교 3학년이 돼서야 정식 음악교육을 받았다. 넉 달 작곡 레슨을 받고 서울대 작곡과에 입학했다. ‘실전’경험은 교회에서 충분히 쌓았고 음악적 호기심도 충만했다. 산과 들에서 뛰어 놀며 할미꽃을 쓰다듬고 ‘나무야 나무야’ 동요를 불렀던 경험이 그를 따뜻한 심성의 음악가로 키워냈다.

현재 국내 최고의 지휘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임헌정(56)씨의 어린 시절은 이처럼 소박했다. 그는 “음악을 전공으로 선택한 건 진짜 꿈이었던 목회를 위한 것이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신학대학을 간 누나 두 명을 따라 했던 선택이었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10남매 중 막내인 그를 음악가로 키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임씨가 올해 지휘자로서 뜻 깊은 기록을 세웠다. 부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하 부천필)의 상임지휘자로 일한 지 꼭 20년째, 특정 교향악단의 지휘자론 국내 최장 기록이다. 1991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7곡 전곡 연주를 시작으로 베토벤·슈만·말러·브루크너 등의 교향곡을 모두 연주했다. 주로 유명 레퍼토리만 반복했던 국내 교향악단에 ‘기획’이란 개념을 접목한 ‘사건’이었다.

서울대 음대 연구실에서 만난 임씨는 “가난이 영양분이었다”는 말로 지난 시간을 정리했다. 그는 “처음에는 첼리스트가 되고 싶었다. 레슨비가 없어 포기해야 했다”며 “서울에 올라오니 별천지 음악세상이 펼쳐졌다”고 회고했다. 최고 연주자를 목표로 음악공부도 ‘전투적’으로 했던 친구들에 큰 자극을 받았다.

임씨는 이런 친구들의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끌어냈다. 작곡과 학생들의 모임인 ‘20세기 음악 연구회’를 주도했고, 스트라빈스키의 오케스트라 모음곡인 ‘병사의 이야기’ 등을 국내 초연했다. 서울시내 중·고교에서 악기를 전공하는 학생들을 모아 오케스트라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좋은 환경에서 음악을 ‘잘’하기 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면 하지 못했을 일이었죠.”

임씨는 ‘자신만의 음악’을 주문해왔다. “한국의 연주자들은 맞고 틀리는 음악에 집착한다”는 비판이다. 그는 “다양한 경험에서 상상력을 길러야 하고, 자신만의 감정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도 말러와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연주할 때면 여름날 고향의 쓸쓸함을 떠올린다는 그다.

음악을 시작한 동기만큼이나 그의 향후 계획도 자연스럽다. 내년은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의 탄생 150주년이다. 말러의 작품이 생소하던 1999년 국내에 교향곡 전곡(10곡)을 처음 소개했던 임헌정에게 특별할 법한 해다. 하지만 그는 “유난 떨지 않고 조용히 할 일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임씨는 요즘 물러날 때를 준비하고 있다. “언젠가 부천필이 자리를 잡으면 나는 명예롭게 사임할 것”이라고 했다. 그가 예상한 퇴임 시점은 부천필 전용 콘서트홀 완공될 때. 현재 청사진은 나와 있으나 공사 착수 여부는 아직 불투명한 상황이다. 부천필 콘서트홀이 그의 마지막 꿈인 셈이다. 서울시향에 비해 5분의 1 수준인 예산 확충도 남은 과제로 꼽았다.

그는 이어 “예산도 문제지만 어려서부터 독주 위주로 시작하는 음악 교육 또한 달라져야 한다”며 “외국에 비해 국내 오케스트라가 왜 안 되는지 등, 음악환경 전반을 점검해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퇴임 이후 계획? 아직 없어요. 불러주는 곳만 있으면 행복하죠. 음악이 어디 장소를 따지나요.”

어린 시절 뒷동산에서 부르던 노래처럼 그는 지금도 자유로운 음악을 꿈꾸고 있었다.

김호정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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