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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슨의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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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영어에 '홉슨의 선택(Hobson's choice)'이란 표현이 있다. 사전에는 '주어진 것을 갖느냐 안 갖느냐의 선택'으로 풀이돼 있다. 예컨대 빵이냐 밥이냐를 고르는 게 아니라 빵이냐 굶느냐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선택이다.

이는 17세기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마구간을 운영하던 토머스 홉슨의 이름에서 따온 말이다. 홉슨은 케임브리지 대학생들에게 돈을 받고 말을 빌려줬다고 한다. 그는 학생들이 말을 잘 보살펴주지 않을 거라고 의심해 좋은 말은 아예 빌려주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볼품없는 말들을 마구간 입구에 매어두고 "입구 쪽의 말이 아니면 빌려갈 수 없다"고 했다. 학생들로선 그런 말을 빌리느냐, 아니면 빌리지 않느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홉슨의 선택'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400여년 전 케임브리지 대학생들이 겪었던 상황이 우리 정치에도 종종 나타나는 건 무슨 이유일까. 대표적인 사례가 '대통령직을 건다'는 식의 극단적인 표현이 아닌가 싶다. 10여년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쌀 수입을 막겠다며 그런 공약을 한 적이 있다. 최근엔 노무현 대통령도 대선자금 수사나 수도 이전과 관련해 비슷한 말을 했다. 일견 불퇴전의 의지를 과시하며 배수진을 친 것처럼 보이긴 한다. 하지만 실제론 다른 대안을 봉쇄함으로써 스스로를 '홉슨의 선택'으로 빠뜨린 셈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도양단의 상황으로 몰아가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미래를 향한 진보냐 과거로의 회귀냐', '강남의 이익이냐 국가의 이익이냐', '다른 어떤 정책적 이익을 희생하더라도', '정부의 명운과 진퇴를 걸고'…. 이런 발상이나 표현이 모두 그런 사례다. 너무나 단순명쾌하기 때문일까. 복잡한 이해관계의 절충이나 타협을 더 어렵게 한다.

비스마르크는 정치를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했다. 정치란 사회문제를 냉정하게 파악해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선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다양하게 늘릴 필요가 있다. '이것 아니면 관두라'는 홉슨 식의 정치는 문제해결의 가능성을 막을 뿐이다. 열린 정치란 대안의 정치가 돼야 하지 않을까.

남윤호 정책기획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