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두 사람은 잠들어 있던 일본인의 자존심을 일깨운다. 가령 “미국이 대(對)소련 군사력의 우위를 지키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반도체 기술은 일본에 있다”(이시하라)거나 “미국 기업은 돈놀이와 인수합병(M&A)에만 열중할 뿐 제품을 만드는 활력과 창조력을 모두 잃어버렸다. 남은 것은 일본 기업뿐이다”(모리타)는 식이다. 일본 정부를 향해서는 미국의 부당한 무역 압력에 굴복해선 안 된다고 주문했다. 그리하여 “미국에 대해 당당히 노라고 말할 때 비로소 일본은 세계의 여러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책이 나온 1989년은 ‘잃어버린 10년’을 맞기 직전, 거품 경제의 최절정기였다. 아직 중국이 대두하기 전이니 일본이 미국에 이은 수퍼파워 국가가 될지 모른다는 전망까지 나오던 때였다. 이시하라와 모리타가 “NO”를 외친 것은 그런 자신감의 발로였다.
하지만 그 이후 일본 사회가 두 사람의 고언대로 움직였던가. 이에 대한 대답 또한 NO다. 여전히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미국과 협조 체제를 구축하는 데 모든 외교력을 쏟아 부었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미국이 중국과 접근하면서 일본을 따돌리는 ‘재팬 패싱(Japan Passing)’ 현상이 일어나자 제발 우리에게도 관심을 쏟아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올 들어 일본에서 54년 만의 정권교체가 실현되자 말 그대로 눈을 씻고 봐야 할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민주당 내각은 자민당 정권 시절 미·일 합의사항인 오키나와 미군 기지 이전 문제를 놓고 미국과 한판 충돌을 불사할 분위기다. “지난 수십 년을 통틀어 일본이 최초로 미국에 반항한 일”이란 외신의 평대로다. 패전 후 60년 만에 그 무거운 입을 열고 NO라고 말하기 시작한 일본. 확전이냐 수습이냐, 다음 라운드가 궁금해진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