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뉴스] 고사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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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999년 12월 미국 캘리포니아

미국삼나무 위 오두막에는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이란

23세의 여성이 있었다.

땅 위 55m 높이에서 783일간

외롭고 힘겨운 농성으로

벌목을 막아낼 수 있었다.

2001년 5월 경기도 용인

대지산 신갈나무 위 텐트에는

34세의 박용신이 있었다.

17일간 벌인 그의 시위 덕에

아파트 개발로 사라질 뻔한

대지산 숲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2004년 8월 31일

경기도 광릉의 국립수목원 앞

나무 베어내는 행사가 열렸다.

옆으로 쌩쌩 달리는

자동차 매연에 시들고

차에 받혀 부러지고 말라죽은

150살짜리 노거수 열한 그루.

숱한 세월 꿋꿋이 지켜왔지만

사망진단 받은 것은

오염에 노출된 지

불과 몇년 새.

잘리는 데는 30분도 안 걸렸다.

나무의 혼을 위로한다며,

숲이 활력을 되찾기 바란다며

쌀과 팥을 뿌리고 향을 피우는

'위령제'를 지냈다지만

이미 죽어버린 나무가

분향 내음은 어떻게 맡고

축문과 헌시(獻詩)인들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나무의 혼령들이 있다면

정말 위로를 받기나 했을까.

자신을 말라죽게 한 공해는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위령제 한번으로

제 잘못을 씻으려는

인간의 이기심에

더 큰 분노를 느끼지나 않을까.

*광릉 국립수목원은 지난달 31일 "고사목이 쓰러지면 지나가는 차량과 사람에게 피해를 줄 우려가 있다"며 '광릉 숲 회생 기원을 위한 고사목 위령제'를 열고 말라죽은 노거수 열한 그루를 잘라냈다.

강찬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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