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이방인의 도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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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마카오가 오늘 중국으로 돌아간다.

재작년 홍콩 반환 때와 같은 흥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마카오는 면적도 인구도 홍콩의 몇십분의1에 불과한 작은 도시고 경제규모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앞서 진행된 홍콩 반환이 현대중국 최초의 실지(失地)회복이란 흥분을 다 삭혀놓았다.

마카오 반환에는 홍콩 반환과 또다른 의미가 있다.

홍콩이 19세기중엽 식민주의세력에 전쟁으로 빼앗긴 곳인 반면 마카오는 그보다 3백년 앞서 통상을 청하는 서양인들을 중국측에서 수용한 거류지였다.

홍콩 반환이 1백50년 역사의 정리라면 마카오 반환은 4백50년 역사의 정리다.

15세기말에서 16세기초에 걸친 대항해시대의 주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두 나라는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으로 세계를 동서로 나눠 대서양으로부터 동쪽은 포르투갈이, 서쪽은 스페인이 맡기로 하고 있었다.

아직 세계지도도 제대로 그리지 못하던 시점에서 두 슈퍼파워가 세계를 나눠가진 것이다.

필리핀을 제외한 아시아 전체는 포르투갈 몫이었다.

포르투갈은 광대한 영역을 차지했지만 대규모 식민지를 건설하지는 않았다.

당시 포르투갈 인구는 2백여만, 대규모 식민지를 경영하러 나갈 인력도 없었다.

포르투갈이 건설하고 경영한 것은 해상제국이었다.

10여개 함대와 10여개 기항지가 이 해상제국의 조직이었고, 향료 중심의 교역이 그 사업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점점이 자리잡은 '식민지' 의 포르투갈인 지배자는 많은 곳이라야 고작 수천명이었다.

1511년 요충지 말라카를 차지한 포르투갈은 중국의 잠재적 교역가치를 주목하게 됐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해상교통을 억제하는 해금(海禁)정책을 펴고 있었다.

교역을 추구하는 포르투갈과 이를 회피하는 중국 사이의 절충안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닷가 황무지 한 모퉁이를 열어 준 마카오였다.

여의도 크기만한 이 땅에 세운 도시가 그후 3백년간 동아시아지역을 향한 유럽인의 활동거점이 됐다.

일본 상대의 흑선(黑船)무역도 이곳에서 출발했고, 예수회 선교사들도 이곳을 근거로 중국에서 활동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大建)과 최양업(崔良業)도 여기서 신학을 공부했다.

포르투갈 해상제국을 밀어낸 영국도 마카오를 아편전쟁(1840~1842)때까지 활동거점으로 삼았다.

그 전쟁의 결과 할양된 홍콩이 발전하면서 마카오는 국제관계의 중심에서 벗어나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지듯 남아 있게 됐다.

이렇게 좁은 땅에 역사의 실타래가 이만큼 쌓여 있는 곳은 바티칸뿐일 것이라고 마카오 대성당의 한 포르투갈인 노(老)신부는 장담한다.

마카오 반환은 들떠 흥분하기보다 깊은 역사적 의미를 차분히 새겨 볼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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