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역감정법 좌절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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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중앙선관위가 내년 총선이 지역감정 대결의 재판(再版)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의욕적으로 내놓은 방안을 정치권이 외면하고 있다.

정치권의 이런 행태를 놓고 "지역감정 선거운동의 퇴치라는 국민적 합의를 묵살했다" 는 비판과 "내년 총선도 정책대결이 아닌 지역감정이 기승을 부릴 것" 이라는 걱정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지연(地緣).혈연(血緣)을 활용하지 않고 어떻게 선거를 치르느냐" 고 항변한다.

지역감정 선거 퇴치라는 원칙엔 동의하나 정치 현장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 선관위 권고안 묵살 과정〓중앙선관위의 4개항 선거법 개정 의견이 국회 정치개혁특위에서 폐기된 과정에는 여야의 일치된 이해가 있었다.

지난 10월 24일 정개특위 여야 의원들은 선관위측으로부터 "선거법 개정의 핵심은 지역선거 타파에 있다" 는 조항 신설의 취지를 듣고 잠정 합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11월 회의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이 "선관위가 너무 욕심을 낸다" "선거분위기를 위축시키는 지나친 규제" 라는 이유로 제동을 걸었다.

당초 선관위안을 공동여당안으로 받아들였던 국민회의 이상수(李相洙)의원도 "연고를 적시한 선거운동의 한계를 명확히 하기 어렵다" 며 야당의 폐기 주장에 묵시적으로 동조했다.

중요하고 민감한 내용이었지만 토론은 길지 않았다고 한다.

국회파행으로 뒤늦게 가동돼 부족한 시간에 많은 내용을 심의해야 했던 정개특위의 속사정 때문이었다.

다만 선거 때 극성을 부려, 혼탁선거의 주범으로 지적돼온 향우회(지연).동창회(학연).종친회(혈연)의 모임 금지를 선거기간(17일간)중에만 적용토록 하는 조항은 겨우 살아남았다.

선관위안은 선거 30일 전부터 였지만, 정개특위는 "헌법상 보장된 집회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한다" 는 이유로 금지기간을 반으로 줄인 것이다.

그러나 선관위측은 "연고에 바탕한 사조직을 동원해 선거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정치권의 현실론과 편의주의 때문에 축소됐다" 고 반발하고 있다.

◇ 지역연고 활용 현실론〓여야 의원들은 대부분 "지연.학연.혈연 연고를 찾지 않고는 선거가 불가능하다" 고 주장한다.

한나라당의 강원지역 한 의원은 "유세 때 '나는 이 지역에서 30년간 살아온 사람인데 어디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 하고 있다' 는 정도의 얘기도 못하게 하면 선거가 도대체 안된다" 고 주장했다.

자민련 충청권 의원도 "유권자가 후보자의 출신지와 출신 학교를 따지는 게 뿌리박힌 투표행태" 라며 "자민련 영남권 의원들이 지역의 반(反)호남정서에 호소하는 한나라당의 선거전략 때문에 탈당하려는 게 우리의 현실" 이라고 지적했다.

선전벽보에 원적.본적지 게재 금지 사항도 비현실적이라는 게 정치권의 주장이다.

선관위 개정 권고안중 ▶법정 인쇄물에 본적지 등을 실을 수 없게 한다든지▶선거구민의 출신 연고별 인구수 등을 일정기간 공표.보도할 수 없게 하는 대목은 지역대표 기능을 갖는 총선의 기본성격과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 선거풍토 개선 필요성〓정치개혁시민연대 손봉숙(孫鳳淑)대표는 "선거의 가장 큰 병폐인 지역감정 활용 풍토를 없애기 위해 선관위안을 중심으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고 강조했다.

국회의 한 상임위원장은 "여야의 내년 총선전략의 출발은 지역감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느냐에 있다" 고 실토하고 "선관위 방안 중 실천가능한 대목을 살리지 못할 경우 내년 선거는 과거에 못지 않게 극심한 지역 대결 양상으로 흐를 것" 이라고 경고했다.

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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