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글과 말 틀어막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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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여야가 불공정 선거보도를 한 언론인에 대해 취재.집필, 또는 방송활동을 일정기간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선거법 개정에 합의한 것으로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여야가 구상 중인 내용의 핵심은 '선거기사 심의위원회' 라는 기구가 선거 보도의 불공정성을 심판, 해당 언론인의 업무를 1년간 정지시킨다는 대목.

어떤 보도 내용이 불공정한 것이냐는 명확한 기준과, 심의절차에 대한 규정도 없이 내려지는 '자의적 판정' 이 합리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선 지적되고 있다.

현직 언론인에 대해 취재.편집.집필 업무를 중단시킨다는 내용은 언론의 비판적인 선거보도를 자연스레 위축시킬 수밖에 없다는 게 대다수 언론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고려대 오택섭(吳澤燮.신문방송학)교수는 "만약 그같은 조항이 법제화될 경우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여부를 따져야 될 정도의 독소조항" 이라며 "언론자유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규정한다" 고 말했다.

그는 "불공정 판정이란 것은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규정하기 힘든 개념" 이라고 강조했다.

한림대 유재천(劉載天.신문방송학)교수도 "언론인의 취재활동을 정지시키는 규정은 외국에도 전례가 없는 일" 이라고 지적했다.

광운대 주동황(朱東晃.신문방송학)교수는 "언론규제는 자율에 맡겨야 하는 게 원칙" 이라고 말했다.

현재 언론의 오보(誤報)심의 기능을 맡고 있는 법원과 언론중재위.방송위원회 등에서도 반론청구.정정보도 외에 이같은 극약처방을 삼가고 있는 상황이다.

여야의 입법 절차도 허점을 노출하고 있다.

지난달 17일 정치개혁특위 소위에서 이 조항을 밀실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과정에서 공청회 등 언론계나 학계.법조계의 의견수렴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았으며 쉬쉬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정개특위의 국민회의측 간사인 이상수(李相洙)의원은 "당초 이 내용은 선관위 개정시안에 들어 있던 것이고 이를 기초로 공동여당안을 만들어 야당측과 논의했다" 며 "이 과정에서 야당측도 별 문제를 삼지 않았다" 고 주장했다.

李의원은 또 "방송의 경우 현재도 선거방송심의위원회가 불공정보도를 한 언론인에 대해 1년 이내의 출연정지를 규정하고 있어 신문에도 똑같은 제재규정을 준용하려 했던 것" 이라고 했다.

한나라당측 간사인 신영국(申榮國)의원은 "여당이 좋은 취지로 제안해와 이견 없이 수용했다" 고 밝혔다.

여야 협상대표들은 그러나 문제가 불거지자 "당시 이 내용을 잠정합의한 후 언론에 알리려 했으나 마침 보도진이 보이지 않았다" 는 석연치 않은 해명을 덧붙였다.

특히 자민련측 간사인 김학원(金學元)의원은 "나는 모르는 일" 이라고 했다.

정치개혁특위 안동선(安東善)위원장도 "아직 보고를 받지 못해 내용을 모른다" 고 했다.

그러나 安위원장은 "절차상의 문제들을 떠나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언제든 특위차원에서 재검토를 하겠다" 며 "당장 이상수의원과 그 문제를 협의하겠다" 고 말했다.

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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