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대통령이 경제 살리기 앞장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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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보다 더 심한 경제침체가 계속되면서 서민들이 기본생계도 꾸려나가지 못해 이혼율이 급증하고 아동 보호소에 버려지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등 서민가족 해체 추세가 가속되고 있다. 끼니를 거르는 결식학생들과 수도.전기료와 세금을 내지 못하는 가정 수가 예상외로 많아졌다는 최근의 정부 보고서는 수출증가와 높은 외환보유액 등 몇몇 거시지표만을 자랑하면서 자신만만해온 우리 정부의 경제 착시(錯視)현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침체 계속되면 서민들만 고통

386을 위시한 정부.여당의 실세들과 일부 시민단체들은 그동안 경제를 걱정하는 많은 사람을 마치 정부의 개혁정책을 호도하려는 불순 수구세력으로만 몰아붙여 왔다. 그러나 이들은 경제가 침체하면 제일 먼저 고통받는 계층이 서민들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 경제가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은 소위 강남의 부유층이 더 잘 살자는 것보다 기본 생계를 꾸려가기도 벅찬 수많은 우리나라 서민들이 보다 윤택한 생활로 사람답게 살아가자는 데 있다.

여러 후진국들을 방문해 보면 못사는 나라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은 서민들이지 부유층이 아니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빈민굴에서 험하게 생활하는 수많은 서민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경비원들이 24시간 감시하는 마카티 지역의 부자동네에 가보면 워싱턴 최상류 주거지역 못지않게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히려 인건비가 저렴하기 때문에 각 가정에 가정부.정원사.유모.운전사들을 거느리고 떵떵거리는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상류층은 미국과 영국 등 서방 선진국 상류층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국가의 경제발전은 정부가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최고의 인권신장 정책이다. 그러면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인 매킨지가 지난 10여년에 걸쳐 전 세계 선.후진국들의 경제를 비교해본 결과 국민의 지능 우열이 아니라 경제의 생산성 차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발견했다. 선진국들의 높은 생산성은 예외없이 정부의 부당한 간섭과 독과점이 없는 공정한 경쟁이 지배하는 참다운 시장경제에서만 가능하다고 매킨지는 결론짓고 있다.

반대로 자연 자원이 많은 것은 오히려 경제 발전에 지장이 되기 쉽다고 여러 전문가는 지적하고 있다. 1인당 부존자원이 가장 많은 나라는 세계 제일의 석유매장량을 자랑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이지만 미국의 9.11 테러범 대부분이 사우디 청년들인 것처럼 높은 실업률과 불안한 안보 상황으로 경제는 중진국 수준에도 못 미치고 있다. 마찬가지로 자연자원이 풍부한 브라질.아르헨티나.인도네시아 등도 만연한 부패와 인종.종교적 갈등으로 빈국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오직 캐나다.뉴질랜드 같은 몇몇 자원 부국만이 참다운 시장경제 체제를 동시에 유지해 높은 생산성으로 선진국 대열에 서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참다운 시장경제는 말로는 쉽지만 실천하기엔 너무도 어려운 제도다. 이미 선진국에 들어가 있으면 견고한 중산층이 건재해 정치선동자가 달변으로 포퓰리즘을 외쳐도 먹혀들지 않기 때문에 경제는 비교적 평탄하게 전진할 수 있다. 그러나 중.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가는 과정에서는 시장경제 체제가 쉽사리 손상당할 확률이 아주 높다. 급변하는 경제발전의 미래에 막연히 불안해 하는 기득권층, 포퓰리즘의 물결을 권력장악에 이용하려는 정치 선동가, 정치세력화된 노동조합, 기회주의적인 시민단체 등등의 복병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 시장경제 체제 허무는 세력들

이러한 장애물을 극복하고 선진국이 되려면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한때 남미와 아시아에서 선진국 행세를 했던 아르헨티나와 필리핀이 지도자를 잘못 만나 빈국으로 쇠락한 반면 국내총생산(GDP)의 20%를 공헌하던 영국 군사기지의 철수로 위기를 맞은 가난했던 신생 싱가포르 도시 국가가 30년 안에 선진국으로 올라선 것은 바른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를 꽃피워 높은 생산성으로 타락해가는 우리 서민층을 살리자면 여당과 정부 내의 몇몇 경제 전문가들에게만 맡기지 말고 지도자인 대통령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앞장서야 할 것이다.

박윤식 미 조지워싱턴대 교수.국제금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