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몰 광고서도 ‘살색’이 ‘살구색’으로 바뀌었는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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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호 34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아테네 사람이었다. 아테네에서 태어나 자랐고, 학교를 열어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아테네 시민이 되지 못했다. 부모가 모두 아테네 시민이 아니면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법률 때문이었다. 아테네의 민주정은 사실 도시 인구 중 1.5~2%만이 참여할 수 있었던 폐쇄적인 정치체제였다. 민주주의의 발원지로 알려진 아테네가 사실 그리 민주적인 사회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나현철 칼럼

그리스의 도시문명이 꽃피던 시절 이탈리아 중부 테베레강 옆의 작은 마을로 시작한 로마는 달랐다. 자기 마을로 오는 이주민들을 언제나 환대했다. 노예도 해방되면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 무력으로 굴복시킨 사람들조차 자신의 문화와 생활방식에 적응하면 ‘로마인’으로 받아들였다.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상반된 태도는 수백 년 뒤 세계적인 대제국과 쇠퇴한 소도시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메시지다.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성서에서 ‘대왕’으로 불리는 키루스의 페르시아제국, 인종의 용광로를 만들어낸 현대 미국도 다른 사람과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고 융합시키는 능력이 뛰어났던 나라들이다.

오랜 기간 한국은 농업과 유교문화에 바탕을 둔 폐쇄적 사회였다. 그리스의 도시국가처럼 이방인이나 외국인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문화였다. 수천 년간 주변 국가나 민족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은 경험도 있었다. 하물며 그 이웃들이 보통내기들이 아니었다. 중국이나 일본·러시아·미국 등 당대의 수퍼파워들이 번갈아가며 한국땅을 지나갔다. 그때마다 약소국의 콤플렉스와 자기방어 본능이 함께 커져갔다. 획일성과 배타성은 저절로 따라오는 부록이었다. 다행히 지난 50년간 한국 경제가 눈부신 성장을 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집계한 한국의 지난해 경제규모는 세계 15위다. 경쟁국들이 경제위기로 죽을 쑤는 동안 선두 기업들이 활약하면서 질적 경쟁력도 크게 높이고 있다. 선진 7개국(G7)을 대체해 세계 경제의 새로운 주축이 된 주요 20개국(G20) 모임에서도 발언권이 강해지고 있다. 이방인에 대한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국제결혼을 이상하게 여기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서양인이나 중국ㆍ동남아 사람이 지나간다고 해서 깜짝 놀라지도 않는다. 다른 나라와의 교역으로 먹고 살고 경제를 성장시켜야 하는 나라에선 피치 못할 변화다.

이런 변화는 법과 제도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초등학생도 다 알고 있을 ‘국기에 대한 맹세’의 한 구절이다. 1968년 처음 만들어진 뒤 40년 가까이 흐른 2007년 7월 일부 문구가 수정됐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란 문구가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으로 대체됐다. 국민의례 때마다 다짐하는 충성의 대상은 이제 핏줄이란 과거형 가치가 아닌 자유ㆍ정의라는 공동체의 미래 목표다.

군말 없이 환불해 준다며 한창 방송을 타는 한 쇼핑몰의 광고도 등장한 지 얼마 안 돼 살짝 바뀌었다. 핑크색을 골랐는데 엉뚱한 색깔의 옷이 배달돼 오자 여자 모델이 전화로 항의를 하는 장면이다. 처음 “이게 무슨 핑크색이에요, 살색이구먼”했던 모델이 요즘엔 “이게 무슨 핑크색이에요, 살구색이구먼”이라고 말한다. 몇 년 전 크레파스의 ‘살색’이 ‘살구색’으로 바뀐 이후 국가인권위원회는 인종차별 느낌이 강한 ‘살색’이란 표현을 쓰지 말라는 권고를 언론과 교육계에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가는 길이 도시국가적인 폐쇄성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얼마 전 미누라는 네팔 청년이 강제추방됐다. 18년간 한국에 살며 문화운동과 인권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가 네팔로 돌아간 뒤 ‘인권 침해다’ ‘다문화 사회이길 스스로 포기했다’는 비난과 ‘촛불집회 등에 참여한 정치색이 문제’라는 찬성론이 엇갈렸다. 보기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을 듯싶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한국이 다문화 사회로 가고 있지만 그 변화의 속도와 폭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아직 부족하다는 점이다. 한국인이 되거나, 한국에서 살기 위한 기준이 너무 엄격하고, 기준도 불분명하다고 하소연하는 외국인이 적지 않다. 출신 국가에 따라 잣대가 달라지는 등 국적이나 영주권을 취득하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들린다. 물론 어렵고 민감한 문제다. 하지만 개방과 융합이 대세인 시대에 언제까지 미뤄둘 수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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