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친이 베이징에 간 이유] 중·러 '반미악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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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중국과 러시아가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중국 외교부는 러시아의 체첸문제 처리방식을 공식 지지하고 나섰다.

미국을 비롯해 서방의 모든 나라가 러시아를 나무라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9일 병든 몸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미국과 서방의 신간섭주의를 배격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양국은 왜 이처럼 밀착할까. 미국이 우려하는 대로 이른바 항미(抗美) 중.러 동맹의 시대가 오는 걸까.

◇ 중국 입장

경제난으로 비틀거리고 서방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러시아지만 중국으로선 소중이 챙겨야 할 이웃이다.

첫째, 러시아는 냉전 이후 다극화를 지향하는 중국외교의 최대 후원자다.

중국의 국력이 충분히 발전, 미국을 압도하기 전까지 세계 강대국들이 다수가 포진해 견제와 균형을 이뤄주는 게 중국의 바람이다.

코소보 사태에서 중.러는 비록 힘의 한계를 느끼긴 했어도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들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을 구축했다.

둘째, 국방강화를 위해선 러시아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중국은 수년간 러시아의 전투기 수호이 - 27을 2백대나 들여왔다.

최근엔 신예 전투기인 수호이 - 30에 대한 구매계약을 60대 체결했다.

또 지난 10월초엔 러시아 태평양 함대와 첫 합동훈련을 가졌다.

항공모함 건조에도 러시아의 기술지원이 필요하다.

우주항공 분야에서의 협력도 아쉽다.

대신 중국은 러시아에 현금을 제공할 수 있다.

셋째, 양국간 긴장완화로 불필요한 국방비 지출이 엄청나게 줄었다.

중국은 96년부?러시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카자흐스탄 등과 이른바 중앙아시아의 5개국 정상회담을 매년 개최, 중.러 국경지역을 안정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 국경지역 주둔군 50만명을 감군할 수 있었다.

중국은 특히 21세기엔 러시아가 부활할 것으로 믿는다.

지금부터 착실히 신뢰를 쌓아두는 게 영원한 이웃일 수밖에 없는 러시아와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할 수 있는 방편이라는 계산이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 러시아 입장

중국에 접근하는 이유는 대외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러 대통령 외교정책 자문위원인 카렌 브루텐츠 박사는 "친미 일변도 외교가 미국.유럽.아시아 3자를 다 중요시하는 균형잡힌 외교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 이라고 설명했다.

즉 과거 코지레프의 친미.유럽 일변도 외교로 러시아는 동유럽에 대한 영향력 포기 등 옛 소련의 유산을 미국에 양보했지만 차가운 냉대와 국가 위상 추락이라는 결과만을 빚어 이에 대한 근본적 수정이 불가피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인식의 변화는 서구주의자들의 수장격인 코지레프가 지정학주의자의 수장으로 알려진 프리마코프로 대체되면서 정책적으로 분명하게 나타났다.

즉 러 외교의 우선적 목표를 ▶국익에 봉사하고▶미래의 러시아 부활에 도움이 되는 외교에 둔 것이다.

이를 위한 실천전략으로 ▶유라시아에 걸쳐 있는 러시아의 지정학적 고려▶옛 동맹국들에 대한 고려▶독립국가연합(CIS)국가들에 대한 통합강화 등을 설정했다.

중국과의 21세기 전략적 파트너 관계 구축, 중국군 현대화 지원 등을 통한 미국의 유일 패권국적 지위에 대한 억제 등은 이러한 측면에서 자연스레 등장했다.

여기에는 러시아의 약화된 국력으로 인해 혼자서는 당장 미국에 대항할 수 없으며 중국이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강화할 경우 러시아 안보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어 미.중 접근을 차단해야 한다는 절박함도 깔려 있다.

모스크바〓김석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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