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20년전의 한·미 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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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꼭 20년 전 12.12 군부 쿠데타를 전후한 한국사회의 격동기에 주한 미국대사와 주한 유엔군사령관을 지낸 윌리엄 글라이스틴과 존 위컴 두 사람이 회고록을 썼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 시해사건부터 광주민주항쟁, 전두환(全斗煥)대통령 취임까지 격동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곧 중앙M&B에서 번역 출간될 두 책을 미리 접해본 기자는 한.미관계에 여전히 적실성이 있는 메시지를 발견했다.

첫째, 한국에는 고압적 자세가 통한다고 생각하는 적지 않은 미국 관리들과 미국의 영향력을 막연히 과대평가하는 한국인들의 인식이 정상적인 양국관계의 일탈을 촉발시킨다는 사실이다.

朴대통령 시해사건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든가, 12.12 쿠데타 이후 일부 군장성들이 역(逆)쿠데타를 도모하며 미 정부에 지지를 호소했다는 것 등이 그 사례다.

둘째,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에서 최우선 고려사항은 '안정' 이며 미국이 앞세우는 가치가 도전받더라도 한국인 대다수가 지도자의 전횡에 침묵한다면 미 정부는 현실수용쪽을 택한다는 사실이다.

글라이스틴 대사나 위컴 장군은 모두 전두환 장군의 득세과정에서 드러난 한국 지도자들의 기회주의나 국민의 사태순응적 태도에 실망감을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힘있는 이들을 대화의 상대로 택하게 마련. 결국 한국의 실세들을 현실로 인정했다.

마지막으로 미 정부가 한국에 대한 영향력 행사의 수단으로 북한카드에 유혹을 느끼곤 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김대중씨 구명을 위해 북한카드를 활용하려던 미국은 20년 뒤 대통령이 된 金씨가 미국을 향해 대북관계 개선을 촉구하는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두 회고록에는 전두환 장군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깊이 스며 있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입김을 차단하고 미국을 골탕먹인 데 대한 분노라 볼 수도 있다.

한.미관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미국 골탕먹이기나 미 정부가 한국 다루기에 전전긍긍했던 사례에 혹시 관심있는 이들이 있다면 곧 출간될 책들을 권하겠다.

길정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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