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시위로 WTO개막식도 못열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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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새 천년 새로운 세계무역 질서를 다루는 뉴라운드 협상이 첫걸음부터 험난하다.

회의가 열리는 미국 시애틀 도심은 개막일인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내내 시위대에 의해 점거돼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 개막식이 취소되는가 하면 시위대의 봉쇄로 각종 회의가 무더기로 취소되는 등 역대 회의 중 최악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 대표단도 숙소인 셰러턴 호텔에서 묶여 있다 오후에야 한덕수(韓悳洙)통상교섭본부장과 관계자들이 가까스로 회의에 참석했다.

○…WTO 각료회의 개막연설을 위해 시애틀에 온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부자 나라들이 간신히 경쟁을 뚫고 수출에 성공한 가난한 나라들의 제품에 보복관세를 부과함으로써 타격을 주고 있다" 고 비난했다.

그는 "상품을 충분히 상호 수출할 수 있어 행복한 처지인 선진국들은 개도국들로부터 완제품이 아닌 원료만 수입하기를 바라고 있다" 면서 "그 결과 개도국 제품에 매기는 관세가 선진국 제품에 부과되는 것보다 네 배나 높은 실정" 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시애틀로 출발하기 전 기자들과 만나 "상당수 개도국들이 환경 및 노동기준에 대한 우리의 우려를 그들을 억누르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진실은 그렇지 않다" 고강력한 자유무역 옹호 입장을 재천명했다.

○…이날 오전 7시30분 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애틀 도심으로 집결하기 시작한 시위대는 우선 각국 대표단이 묵고 있는 셰러턴 호텔부터 봉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팔짱을 낀 채 '인간 사슬' 을 만들어 회의가 열리는 워싱턴 컨벤션 센터 등의 출입구를 가로막고 출입자를 통제했다.

현지 언론들은 이번 시위가 지난 68년 시카고의 월남전 반대시위 이후 최대 규모라며 샬린 바셰프스키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조차 개막식장인 컨벤션 센터에 입장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셰러턴 호텔에 묵고 있는 한국 대표단도 호텔 주변이 봉쇄돼 외부 출입을 할 수 없자 인근의 총영사관에 임시 대표단 본부를 마련, 각국과 연락을 취하며 비상대기에 들어갔다.

○…시위대들에 의해 시애틀은 무법천지였다.

'맥도널드' 등 미국의 유명상표를 붙인 상점들이 시위대에 의해 부서지고 보석상 진열장이 깨지는가 하면 은행문도 뜯겼다.

경찰이 최루탄으로 해산을 시도했으나 실패, 개막식은 취소되고 예정보다 5시간 이상 지나 개막이 선언됐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시위 참가자들이 진압봉에 맞아 머리가 깨졌으며 경찰은 수갑이 모자라 나일론 끈을 임시 수갑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오후 7시부터 도심 전역에 통행금지령이 발효됐지만 밤중에도 최루탄 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으며 경찰 헬기가 도심 상공을 순회하며 상황을 살폈다.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일본 외상이 대규모 시위 때문에 WTO 각료회의에서 유일하게 연설을 하지 못한 장관이 됐다고 일본 정부 관리가 불평했다.

일본 정부는 주최측인 미 정부에 항의를 표시하고 고노 외상의 참석을 보장할 만큼 충분한 조치가 취해졌는지 따졌다.

고노 외상은 시애틀 시내 호텔에서 회의장까지 시위대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던 데 반해 다른 19명의 참가 장관들은 시위가 거칠어지기 전에 회의장에 들어가 연설할 수 있었다.

○…뉴라운드의 출범이 시작부터 삐걱거림에 따라 향후 WTO의 진로와 뉴라운드 협상 전망도 불투명해지고 있다.

더구나 자유교역을 내세우는 미국에서 이같은 일이 벌어짐에 따라 이번 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단은 향후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지도력이 크게 손상될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연합(EU).일본 등은 뉴라운드 회의를 저지하겠다는 비정부기구(NGO)들의 대규모 시위가 사전에 예정돼 있었다는 점을 들어 미국이 이번 협상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 시위를 어느 정도 '묵인' 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내비치고 있다.

실제로 현지 언론들은 미국 내에서 이처럼 보기 드문 과격한 시위가 벌어진 것은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미국 철강 노조원에 대한 클린턴 대통령의 간접적 지지에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이에 마이크 무어 WTO 사무총장은 "평화적인 의사 표시는 자유지만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며 주최국인 미국측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시애틀〓홍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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