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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적 친미를 위한 좀 긴 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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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반도가 원만한 통일을 이뤘다고 할 때 가장 편하고 요긴하게 친구 삼을 강대국이 누구일까? 나는 그것이 미국일 거라고 생각한다.

중국.러시아.일본 같은 이웃들과도 물론 좋게 지내야겠지만 국경을 맞대거나 좁은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둔 강국의 존재는 아무래도 부담스럽게 마련이다. 상대방에서도 비록 자기들보다 작은 나라일지언정 통일된 한반도는 경계의 대상이기 쉽다. 그에 반해 멀찌감치 떨어진 미국하고는 일단 지정학적으로 서로가 편한 위치다. 미국과의 친선은 통일 한반도가 동북아시아에서 제 몫을 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조건이 될 것이다.

미국은 통일 뒤에도 가장 편한 친구

경제와 문화 분야에서도 동아시아 지역의 위상이 높아지고 미국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줄어든다고 해서 대미교류가 덜 요긴해질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때 비로소 불평등 교역이나 일방적 전파에서 벗어나, 교류의 성과가 오롯이 우리의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원만한 통일, 적어도 그러한 통일을 향한 결정적인 중간지점으로서의 남북연합을 확실히 이뤘을 때 이야기다. 이 원대한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어찌 갈등이 없을 것인가. 한.미 간이든 남쪽 내부에서든 한동안 갈등을 겪어야 할 터이며, 그 기간도 아주 짧기를 바라기는 어려울 듯싶다.

하지만 '장기적 친미'라는 목표를 일단 공유하게 되면 불필요한 소모를 많이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미국 없이 우리가 어찌 사느냐'면서 미국 측의 요구에 무조건 복종하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러한 공포심이야말로 장기적인 한.미 친선을 도리어 해치는 요인이 됨을 설득한다면 상극의 기운이 한결 누그러질 수 있다. 사실 한국이 미국과 아예 갈라져서는 당장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그들의 진단도 맞고, 미국하고 내내 좋게 지냈으면 하는 목표도 궁극적으로 공감할 만하다. 단지 그 진단에서 그 목표로 나아가는 방안이 문제일 따름이다.

미국이 설혹 자비심으로 가득한 나라일지라도 울며 매달려서 참된 친선관계를 얻어낼 수는 없으려니와, 오늘의 미국은 냉전시대의 미국과도 다르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냉전시대라고 해서 미국이 착하고 후한 나라만은 아니었지만, 맹방에 대해서는 오지랖 넓게 베풀 줄도 알았고 자기네 이익을 챙기면서도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 줄 알았다. 한반도에서도 민족분열을 조장하고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등 못할 짓을 많이 했으나 어쨌든 남한을 지켜주고 한국 경제를 도와준다는 정도의 명분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동서냉전이 끝나고 뒤늦게나마 남북의 교류가 본격화하려는 대목에 이르러, 북핵문제 해결을 구실로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노라고 공언하는 미국은 바야흐로 '안보와 경제'라는 기준에서도 수상쩍은 존재가 돼버렸다. 북의 핵무장을 막는 대가로 한반도가 잿더미로 변한다면 그게 우리한테 무슨 안전보장이란 말인가. 전쟁을 안 하더라도 계속 긴장상태로 끌고 간다면 미국경제는 온전할지 모르지만 한국의 주식시장은 어찌 되며 '동북아 물류중심'은 어느 세월에 만들 것인가.

'선제공격 불사' 공언하다니…

근년에 한국사회에서 반미감정이 빠르게 번진 현상은 단순히 6.25를 모르는 세대가 다수를 차지하게 된 탓만이 아니다. 특히 9.11 이후에 심해진 미국의 일방주의가 기득권층의 이해관계마저 위협하는 형국이 됐기 때문인 것이다.

미국의 이런 정책에 반대하고 그런 정책을 용인하는 미국사회를 비판하는 것이 '반미'라면 그런 '반미'는 아직도 한참 더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것은 반미주의라기보다 우리가 자신감을 갖고 '장기적 친미'를 추진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요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 전체를 무작정 악으로 보는 단견이나 미국의 현실적인 힘을 과소평가하는 경솔함과 거리를 둘 줄도 알아야 한다. 이는 한반도에 훌륭한 인간사회를 건설하려는 사람들의 필수적인 훈련이며, 온갖 해독과 은덕이 쌓인 미국과의 관계를 진정한 선연(善緣)으로 이끄는 일이 우리의 훈련수준을 가늠하는 하나의 결정적 시험이 되기도 할 것이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