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69.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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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제13장 희망캐기 (4)

강릉터미널에서 양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양양에서 한계령을 넘어 홍천으로 이어지는 국도를 따라 서울로 가는 여정을 선택하고 싶었다. 촘촘하게 박힌 정거장마다 들르는 완행버스는 머리 속에 맴도는 상념의 끄나풀을 곧잘 끊어 버린다.

그러나 산주름 사이로 잠깐씩 스쳐가는 차창 밖의 바다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양양을 지나면서 설악산 산록에 흐드러진 단풍 구경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상했다. 갑자기 가슴 뭉클하게 보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다는 신물이 나도록 보았었다. 지긋지긋할 정도였던 그 바다가 문득 보고 싶다는 것이 이상했다. 바다란 그런 곳이었다. 그곳에 살고 있으면 떠나고 싶고, 그것과 멀리 있으면 그리운 곳이었다. 버스는 곧장 강릉 시가지를 벗어나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었고, 그녀가 바랐던 대로 차창 밖으로는 바다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이 떨어져 있는 곳은 차창 밖이 아니었다. 바다가 나타나면 힐끗 한번 시선을 돌렸다가 말았다. 멀리 펼쳐진 청록색의 물너울이나 수평선 따위나 부서지는 파도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기대했던 것은 콧등을 스치는 비린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냄새이기도 했다. 사람들 속에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처럼 사람이 그리웠다.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자들이 상투적으로 지칭하는 남자라는 어휘에는 은연중 그녀들 나름대로 구성한 이상형에 어느 정도 부합되거나 접근되어 있는 남자를 일컫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승희가 만났던 그 남자는 그런 것들과는 단호하게 차단된 모습의 소유자였다. 첫눈에도 그가 현지인 아닌 여행자라는 것은 알 수 있었으나, 왜소한 외양부터 여자들의 시선을 끌만한 건덕지가 없었다. 유심히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런 남자가 이 광장을 배회하고 있다는 것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유난히 작달막한 키꼴은 그렇다 하더라도 옆으로 퍼진 얼굴에 눈과 귀와 코가 오종종하게 박혀 있었다.

얼른 봐서 사십대 초반의 나이로 짐작되는데, 나선형의 주름이 간 근시 안경을 덮어쓰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성적인 면모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근육질의 사내로 보이거나 성깔이 당차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이를테면 피가름을 하다 보니 하는 수 없이 남자로 분류된 듯한 사내였다. 어쩌면 단체로 여행에 싸잡혀 중국까지 온 것 같은데, 엉뚱한 곳에 열중하다가 일행을 놓쳤거나 따돌림을 당하고 혼자 천안문광장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딱지 덜 떨어진 관광객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일행으로부터 낙오되었든, 따돌림을 당했든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고 나름대로 광장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게 어슬렁거리고 있던 남자의 시선이 웃고 있는 승희의 시선과 문득 마주친 것이었다. 그가 승희의 얄궂은 웃음에 관심을 보여 주었다. 마침 장기를 두고 있는 현지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그 작달막한 남자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을 때만 해도 그날 밤 벌어질 일에 대해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 남자는 웃음지으며 그녀에게 무슨 말인지 물었다. 물론 한국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승희 역시 계속 웃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말레이시아인가, 필리핀인가, 아니면 인도네시아인가. 그런데 이렇다 할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대꾸는 않았지만 그녀는 웃으면서 고개까지 끄덕였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승희가 짓고 있는 웃음의 의미를 알아챈 것처럼 그 남자가 손짓했다. 그 자리에 가만 멈춰있으란 신호가 분명했다. 물론 삼엄하거나 위협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그 남자는 의구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몇 번인가 그녀를 뒤돌아보면서 사람들이 둘러선 조그만 리어카 앞으로 다가갔다. 우라질, 놀고 있네 정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승희는 그 남자를 만났던 지점에서 단 한 발도 떼어 놓지 않았다. 두려움도 없었지만 사내의 행동에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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