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주의자’ 한마디에 세종시 원위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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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야 할 산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드디어 그 산이 눈앞에 나타났다.”

23일 박근혜(얼굴) 전 한나라당 대표가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 입장을 표시하자 정부 고위 관계자가 보인 반응이다. 박 전 대표의 입장 자체는 놀라울 게 없다. 이미 지난 7월 몽골 방문 때도 “충청도민에게 한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한 약속”이라며 “엄연한 약속인 만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사소한 내용이라도 자신이 일단 공언한 것은 철저히 고수하는 게 박 전 대표의 정치 스타일이다. 하물며 세종시는 그가 야당 대표 시절 법 통과를 위해 정치생명까지 걸었던 사안이다.

그래서 박 전 대표가 세종시 문제의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다는 인식이 여권 핵심부에 퍼져 있었다. 다만 최근 박 전 대표가 이명박 대통령과 해빙 무드를 맞고 있기 때문에 세종시 문제에서 넌지시 비켜서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지난달 청와대 회동에서 두 사람이 세종시 해법에 대한 교감을 나눴을지 모른다는 관측도 나왔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이날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한다는 뜻을 명확히 하면서 ‘원칙주의자’의 면모를 재확인했다. 이로써 세종시 수정안 추진은 중대 고비를 맞게 됐다. 박 전 대표가 제시한 처방은 여권 핵심부에서 논의 중인 ‘도시 기능 변경’이 아니라 ‘원안+알파’다. 즉 행정 기능은 그대로 두면서 추가적 지원을 하자는 것이다. 이는 이완구(한나라당) 충남지사나 자유선진당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또 정부 부처 이전으로 생길 ‘행정 비효율’ 문제는 “그런 문제점을 모르고 한 약속이 아니다”며 ‘정치적 신의’에 더 무게를 뒀다.

한나라당이 국회에서 야당의 격렬한 반발을 뚫고 세종시 수정안을 처리하려면 6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친박근혜계 의원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박 전 대표의 공개 언급이 나온 이상 친박계가 이 문제에 적극 찬성으로 나설 가능성은 크게 줄어들었다. 수정안 처리는 차질이 불가피해 보인다.

청와대는 말을 아끼고 있지만 내부적으론 답답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한 관계자는 “세종시가 정책이 아니라 정치게임의 영역으로 옮겨 가고 있다”며 당혹스러워했다. 그래서 당내에선 “세종시 문제 때문에 잠잠해진 친이-친박 갈등이 다시 확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친박계인 김무성 의원이 “잘못된 것은 막아야 한다”며 세종시 수정론에 힘을 실어 줬다. 반면 친이계 안상수 원내대표는 “박 전 대표의 말은 당의 기본 당론이기 때문에 특별히 드릴 말이 없다”고 말해 대조를 보였다.

김정하·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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