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국면맞은 '이근안 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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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고문 기술자' 이근안(李根安)전 경감의 장기 도피에 경찰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비호세력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李씨는 최근 검찰에서 "수배 직후인 88년 12월 치안본부 5차장을 지낸 박처원(朴處源) 전 치안감의 지시로 도피에 들어갔으며 97년에는 도피자금 1천5백만원을 지원받았다" 고 진술했다.

10년10개월 동안이나 경찰 포위망에 걸려들지 않고 도피할 수 있었던 배경에 경찰의 조직적인 비호가 있었을 것이란 세간의 의혹이 어느 정도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검찰 수사는 당시 치안본부장을 비롯한 경찰 고위층의 개입 여부 등 비호세력의 전모를 밝히는 데 집중될 전망이다.

그러나 대공분야에만 40년간 근무해온 朴전치안감은 조직과 부하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어 자신의 독자적 행동으로 몰고갈 가능성이 크다. 그는 최근까지도 후배들에게 대공수사 조언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朴전치안감은 15일 기자들을 만나 "1천5백만원을 李씨에게 준 적도 없고 검찰 수사내용도 아는 바 없다" 고 부인, 수사가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그러나 李씨 수배와 검거가 당시 국민적 관심사였던 만큼 朴전치안감이 혼자 결정했다고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많다.

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 사건과 부천서 성고문 사건, 김근태씨 고문사건 등으로 만신창이가 된 당시 경찰로선 李씨가 검거될 경우의 엄청난 사회적 파문을 염려해 조직적으로 도피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朴전치안감은 朴군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해서도 "대공요원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 며 은폐를 주도했었다.

검찰은 朴전치안감이 李씨 부인에게 건네준 1천5백만원의 출처를 밝혀내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가 개인 돈이 아니라 경찰 고위간부가 포함된 비호세력의 '성금' 을 건넨 것이라면 수사는 급진전될 전망이다.

검찰도 "현재로서는 치안본부장 등 당시 경찰 수뇌부를 소환해 조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고 밝혀 '외곽 두드리기' 에 주력할 뜻을 내비쳤다.

우선 朴전치안감이 대공수사단장으로 근무할 당시 함께 일했던 김수현(金秀顯.66.경감).백남은(白南殷.64.경감)반장 등 부하 경찰관을 잇따라 소환, 보강조사를 벌이고 있다.

金씨는 지난 92년 가을 등 수시로 李씨 집을 방문해 李씨를 만나 격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李씨 부인의 미용실에서 건장한 남자들이 포커판을 벌였다는 주민들의 진술에 비춰 金씨 이외에도 많은 경찰관이 李씨의 거처를 알고 도움을 줬을 가능성이 크다.

검찰은 경찰 내부의 비호세력을 규명하는 작업과 함께 안기부 고위간부 등에 대한 수사도 병행할 것으로 보인다. 李씨 도피가 경찰의 힘만으론 쉽지 않았을 것이란 판단 때문이다.

검찰이 형제간이나 다름없는 경찰과 안기부를 상대로 철저한 수사를 펼쳐 李씨 도피에 대한 전모를 밝힐 수 있을지 여부는 전적으로 검찰 의지에 달려 있다.

김상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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