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나들이] 창작오페라 '산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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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차범석의 희곡 '산불' 은 연극은 물론 뮤지컬.영화로도 선보인 작품이다. 이번에는 오페라로 불이 옮겨 붙었다. 국립오페라단이 국립극장 대극장 무대에 오랜만에 올린 창작오페라는 차범석 원작의 '산불' 을 대본으로 원로작곡가 정회갑(76)씨가 마지막 창작혼을 불태우면서 2년 가까운 산고(産苦)끝에 완성한 작품이다.

주인공 점례 역에 소프라노 정은숙.박경신, 귀복 역에 테너 임정근.이현, 사월 역에 메조소프라노 김학남.장현주 등 연기와 음악성을 고루 갖춘 중견 성악가들이 출연한다.

무대 배경은 한국전쟁 당시 소백산맥의 한 산골 마을. 건장한 남자란 한 명도 없이 여자들만 남아있는 이 마을에 빨치산에게 끌려갔다가 탈출한 젊은 남자 귀복이 나타난다.

귀복이 과부 점례의 도움을 받아 뒷산 대밭에 숨어지내면서 이 두 남녀는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점례의 친구 사월이 이 사실을 알고 이 두 사이에 끼어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절박한 현실과 인도주의 사이의 갈등이 섬세하게 묘사된다.

결국 국군들이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마을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대밭에 불을 지르고, 사월은 여기 숨어 지내던 귀복을 구하기 위해 대밭에 뛰어들어 죽음을 맞게 된다. 귀복과 사월은 우리의 근현대사를 통해 숙명적인 비운에 맞닥뜨리는 한국 남성과 여성의 대명사다. 이밖에도 등장인물의 다양한 군상을 통해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부각시킨다.

작곡자는 55년 지리산 빨치산을 소재로 한 이강천 감독의 영화 '피아골' (55년)에서 음악을 맡았고 이밖에도 이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격퇴' (56년) '젊은 아내' (59년) '두고 온 산하' (66년)등 전쟁 영화에서 배경음악을 작곡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남녀간의 애증이 교차되는 오페라 '산불' 도 전체적 분위기는 이들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작품의 정서적 기반이 되는 농촌 풍경을 그리기 위해 간주곡으로 품바(각설이)타령이 흐르는 시골 시장터 분위기를 삽입했다.

전반적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을 다루면서 어두운 색채가 드리워진 이 작품에 유머와 흥미를 곁들여 관객에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지루함을 덜어준 것이다.

정회갑의 음악세계는 남도 민요의 질박하고 토속적인 정서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전통음악의 어법을 생경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다양한 현대적 기법에 용해시켜 자연스러운 흐름을 구사한다.

또 복잡하고 세밀하게 분할되는 현대적 리듬보다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악상을 전개하는 편이다. '가야고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주제와 변주곡' (60년)으로 국악기와 양악기의 합주를 시도했던 그는 이번 오페라에서도 농악 가락과 관현악의 어울림을 선보인다. 현대적 감각을 가미한 토속 정서가 주조를 이루는 '산불' 은 난해한 창작 오페라는 아니다.

하지만 장면 전환이 많고 대사가 긴 연극 대본을 별다른 수정 없이 오페라 대본으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다소 지루한 느낌을 주는게 흠이다.

연출 박수길, 지휘 박은성. 11~14일 국립극장 대극장. 평일 오후 7시30분, 토.일 오후 4시. 02-2274-1172.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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