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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세한 김자경 여사] 50년 오페라 한평생 영원한 프리마돈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한국 오페라계는 어머니를 잃었다. 오페라만을 남편인 양, 신인 양 섬겨 왔던 영원한 신부를 떠나보냈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 9일 타계한 한국 오페라계의 대모(代母) 김자경(金慈璟)여사는 푸치니의 '토스카' 에 나오는 이 아리아처럼 살았다. '오서방' (오페라)에 대한 짝사랑을 불태우면서. 나이를 물으면 미소띤 얼굴로 "스물 여덟" 이라던 '만년 처녀' . 음악과 함께 한 金씨의 생애는 국내최초 기록의 연속이었다.

그를 빼놓고 한국 오페라 50년사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8년 국내 최초의 오페라 '춘희' (라트라비아타)에 프리마돈나로 출연했고 50년 한국인 최초로 카네기홀 무대에 섰다. 또 68년 국내 첫 민간 오페라단을 창단했다.

원로지휘자 임원식씨가 지휘봉을 잡은 48년 '춘희' 공연에서는 난방이 되지 않아 무대 한켠에 피운 화롯불 때문에 현기증이 몰려 왔고 헐렁한 의상을 고정하려고 꽂았던 핀이 사정없이 살을 찔러 드레스를 붉게 물들였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역을 나눠 맡았던 소프라노가 목청 트이라고 날계란을 계속 먹다 배탈이 나 金씨가 하루 두차례나 무대에 서야 했던 얘기는 성악계의 전설처럼 내려온다.

그로부터 20년 후 金씨는 '단돈 1백만원으로 김자경오페라단을 창단한 金씨의 헌신적인 오페라 운동에 감동받아 홍진기(洪璡基)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 공동 주최를 자처했고 정주영(鄭周永)현대그룹 회장은 전단 배포용 지프를 내줬다.

하지만 그후 집문서를 맡기고 제작비를 빌리는 일이 허다했고 후원과 매표를 위해 기업체를 방문할 때마다 '잡상인' 취급을 받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김자경오페라단은 푸치니의 '나비부인' , 메노티의 '시집가는 날' , 마스네의 '마농' '오펜바흐의 '호프만의 이야기' , 레하르의 '명랑한 과부' '등을 국내 초연했으며 장일남의 '원효대사' '춘향전' , 김동진의 '심청전' 등 창작 오페라를 위촉.초연했다.

金씨는 창극의 오페라화에도 관심이 많아 지난 91년 한양대 대학원 국악과에 입학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경기도 개성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난 金씨는 이화여전을 거쳐 줄리아드 음대에서 수학한 후 이화여대에서 소프라노 이규도.이연화.송광선.이승희 등 제자들을 배출해 냈다.

남편 심형구(전 이화여대 미대 교수)씨와 62년 사별한 후 오페라 운동에 전념해 왔다.

金씨의 좌우명은 '정신을 한데 모으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 (精神一到 金石可透). 취미는 각국의 음악인형을 모으는 것. 오페라 의상에 돈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동대문시장을 돌면서 고른 몇천원짜리 옷들로 멋과 개성을 가꿔 왔다.

유족과 제자들은 '현재 김자경오페라단 연습실로 사용 중인 '金씨의 서울 신촌동 자택에 고인이 수집해온 음반.악보 등 오페라 관련 자료들을 상설 전시할 오페라박물관을 설립할 계획. 또 내년 1월초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는 ' '소프라노 김자경 추모 갈라콘서트' 가 열린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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