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경제불안감의 정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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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올해 우리 경제는 물가가 안정된 가운데 예상을 뛰어넘는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대부분의 경제예측기관들은 내년에도 5%대 성장세와 경상수지 흑자가 이어지고 물가상승률도 3%대에서 안정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렇게 내년 경제전망이 어둡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두터운 불안감이 우리 경제를 에워싸고 있다. 기업들은 내년 경영계획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으며 투자자들도 우왕좌왕하면서 눈치를 살피고 있다. 그들은 크게 두가지 점에서 내년 경제를 확신하지 못한다.

첫째는 성장세가 이어지면서 물가불안이 심화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으며, 둘째는 구조조정이 지체되고 새로운 부실이 발생함으로써 제2위기가 도래할 가능성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경제비관론도 따지고 들면 서로 상충하거나 근거가 희박할 수 있다. 두 부류의 비관론자들이 내년 경제를 보는 시각은 서로 다르다.

제2위기 가능성을 점치는 'W자형 성장론자' 들은 내년 중 물가불안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경기회복세의 급반전을 걱정한다.

이들에게 물가불안 염려는 태풍이 오기도 전에 피해를 과대 경고함으로써 피해를 줄여보자는 연례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로 '물가불안론자' 들은 내년 중 경기급랭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기회복세가 물가불안으로 이어질까봐 걱정하고 있다.

아예 두가지 비관론이 모두 잘못됐을 수도 있다. 지난해 말 정부는 올해 경제성장률이 플러스 2%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국내는 물론이고 국제통화기금(IMF)까지 나서서 장밋빛이라고 비판하더니 실제 경제성장률이 9%에 달했고, 그렇게 염려하던 물가불안도 나타나지 않았다. 올해에도 우리 경제를 상습적으로 비관하는 것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불안해한다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게다.

우선 경기는 예상보다 큰 폭으로 변동하는 성질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올해 경기가 회복세로 반전하자 당초 예상을 크게 웃도는 성장세를 보였다.

올해 빠른 경기회복세의 반작용으로 내년 중 성장세가 둔화된다면 내년 경제성장률은 합의된 전망치 5~6%보다 훨씬 낮을 수 있다.

이렇게 경기가 예상보다 크게 둔화되면서 추가부실이 발생하더라도 올해와 같이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과 재정확대가 불가능하다. 외환위기 이후 국가채무가 두배 가까이 증가했으므로 재정을 통한 경기부양 여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따라서 경기회복은 통화정책수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금리하락에 따른 원화 절하와 해외자본유출을 감수해야 한다.

내년은 '국민의 정부' 가 평가받는 총선이 있는 해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국가일수록 정치적 고려에 의해 경제를 운용하게 되므로 정치적인 이유로 경제위기가 발생하게 된다. 94년의 멕시코 위기와 97년의 한국 위기는 모두 대선이 있었던 해에 발생했다.

총선을 앞두고 경기부양의 필요성을 느낀 정부가 대우사태를 조기에 봉합하고 경기를 부양하려 한다면 결과는 참담해진다.

정부의 금융시장안정 종합대책으로 11월 들어 금융시장이 안정되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대우사태가 해결됐다고 속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서둘러 경기부양에 나선다면 투자자들은 이를 십분 이용하려 한다.

그들은 대우사태가 언젠가 터질 줄 알면서도 대우채권을 사들이고 주식시장을 활황으로 몰고갔던 것처럼, 우리 경제가 여전히 취약할 줄 알면서도 다시 투자에 나서게 된다.

그러다가 97년 말과 같이 선거를 앞두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자신들의 투자수익을 극대화하고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다.

이렇게 보면 '물가불안론' 과 'W자형 성장론' 은 서로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연결돼 경제위기의 훌륭한 시나리오를 만든다. 씨랜드 참사 후 불과 4개월만에 인천에서 다시 참사가 발생했다. 외신들은 연이은 참사가 우리의 안전불감증과 빨리빨리 증후군에서 비롯됐다고 보도하고 있다.

과연 경제는 얼마나 다른가. 대우사태에 이어 제2의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없는가. 부실의 요인은 아직도 산재돼 있고 위기 이후 크게 달라지지도 않았는데 IMF위기를 빨리 벗어나고자 서두르고 있다.

우리 모두가 자만하지 않고 돌다리도 두드려가며 건너갈 때 경제불안감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박원암<홍익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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