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 한발씩 이성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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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권력과 언론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

미국의 언론학자 허버트 알철은 '권력의 대리인' 이라는 저서에서 권력과 언론은 대립관계가 아니라 공생(共生)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언론이라는 콩나무는 권력이라는 박테리아가 만들어 내는 질소 없이는 자라지 못하고, 권력이라는 박테리아는 콩나무가 제공하는 영양분을 먹어야 산다고 비유했다.

알철은 언론이 권력과 같은 독립된 행위자도 아니며 권력과 대립관계에 있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가 보는 언론은 권력의 대리인일 뿐이다.

언론장악문건이라는 것이 정치권을 강타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알철의 주장은 언론에 관한 두가지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낳기가 쉽다.

하나는 권력과 언론의 공생관계가 유착관계로 오해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에 기생(寄生)하면서 권력의 심부름꾼이 된 언론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권력과 언론은 '적당한 긴장관계' 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돼 왔다.

그러나 언론학자 임상원 교수(고려대)는 권력과 언론은 적당한 긴장이 아니라 '확실한 긴장관계' 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삼국지의 영웅들처럼 '서로 대립하면서 상대방을 존경하는 관계' 가 임교수가 바라는 권력과 언론의 관계다.

임상원 교수는 권력이 언론을 '어떤 모습' 으로 만들고 그 언론을 이용하여 세상을 권력의 이상대로 바꾸겠다는 오만한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이번 파문으로 가속이 붙을 것으로 보이는 언론개혁을 누가 주도해야 하는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일부 권력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권력주도 언론개혁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것 같다. 정부 주도의 언론개혁이라는 발상은 사회의 공기(公器)라는 언론의 개혁이라고 해서 기업의 구조조정과 다를 이유가 없다는 것과 같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핵심 참모들이 정부주도 언론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을 피력한 것은 다행이다.

박지원(朴智元)문화관광부장관은 기자협회 세미나에서 언론개혁은 언론사와 언론인의 자율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중권(金重權)대통령 비서실장도 비서실 조회에서 언론문건 파문으로 언론개혁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국민의 일치된 느낌인 것 같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언론개혁은 자율적으로 이뤄져야 효과가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지금 언론파동의 혼란속에서 권력과 언론 앞에는 세개의 큰 과제가 던져졌다. ①나라를 총체적인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문건의 진상을 밝힌 뒤에, ②권력과 언론의 관계에 관해서 이해 당사자들이 다시 한번 냉철하게 생각을 하고, ③언론개혁의 방향을 공론화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시급한 것이 두사람의 기자가 작성하고 전달한 문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것이다. 이 문건 하나에 언론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집약돼 있기 때문이다.

문일현.이도준 두 기자의 일탈행위는 분명히 예외적인 것으로 전체 기자사회에서 자주 있는 일로 일반화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앙일보사태가 무엇보다도 권력과 언론의 관계를 새삼 반추하는 기회를 제공하 것 같이 언론장악문건은 권력과 언론의 관계뿐 아니라 언론인의 윤리적인 각성을 시급한 문제로 띄웠다.

언론학자 양승목 교수(서울대)가 한 세미나에서 언론의 제도개혁 보다 중요한 게 언론인들의 윤리의식 강화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시기적으로 공감이 간다.

독일철학자 헤겔은 마키아벨리를 옹호하는 글에서 썩은 손발을 라벤더 향수로는 치료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언론은 이미 시작한 자기개혁을 더 철저히 할것을 요구받고 있다.

그러나 우선은 모두들 한발씩 이성(理性)으로 물러서야 한다. 신문명정책연구소 장기표 원장의 표현대로 지금의 '집단 히스테리' 같은 상태에서는 문제의 본질은 밝혀지지 않은 채 저마다의 입장에서 쏟아내는 조건반사적인 성명만 난무할 뿐이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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