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5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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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50. 시나외상의 수난

65년 2월 일본 외상의 방한을 앞두고 정부내에서는 일장기 게양과 기미가요 연주는 '말도 안된다' 는 반응이 주류였다.

그러나 나는 한국이 독립국이라는 자부심도 보여주고 시나(椎名悅三郞)도 한국과 국교정상화 문제를 협의하러 오는 일본의 첫 현직 외상이니 만큼 외교관례를 지켜야 한다고 각료들을 설득했다.

2월초 정일권(丁一權)국무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결정키로 했으나 찬성파는 장기영(張基榮)부총리, 양찬우(楊燦宇)내무, 김성은(金聖恩)국방장관 등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丁총리는 걱정이 되었던지 '국무위원은 아니지만 김형욱(金炯旭)정보부장을 불러 밀어 붙이는 게 어떻겠느냐' 며 고육책을 제시했다.

마침내 국무회의가 열렸다. 丁총리와 내가 국무위원들을 상대로 무진 설득을 해 봤지만 대부분 막무가내였다. 이를 지켜 본 金부장이 화가 치민 모양이었다.

그는 장관들을 향해 "그 정도 애국심도 없으면 장관들 다 그만두고 나가시오!" 하면서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각료들은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하나 둘 회의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나는 곧 청와대로 달려 가 "국민감정에 끌려다니다 일을 그르치면 국가 체통이 말이 아니다" 며 결단을 촉구했지만 朴대통령은 묵묵 부답이었다. 그래서 고민끝에 나는 이 문제를 예정대로 추진하라고 외무부에 지시했다.

드디어 2월 17일 김포공항. 시나 외상은 두툼한 오버코트, 한 손에 모자를 벗어든 채 비행기 트랩을 내려왔다.

첫 인상은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알고 봤더니 나의 선친과 동갑(1898년생)이었다. 게다가 윤보선(尹潽善)전 대통령과는 흡사 쌍둥이처럼 닮은 모습이었다.

그도 무척이나 긴장돼 보였다. 그는 공항에 걸린 일장기를 보더니 "아! 히노마루군요"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듯 했다.

시나는 상공성(商工省)에서 관료생활을 시작, 30년대에는 만주국 산업부및 총무청 차장을 겸직해 사실상 만주국을 경영한 장본인이었다.

그후 도조(東條英機)내각의 상공성 차관을 역임하기도 했던 그는 전후 통산성(通産省)이 중심이 된 일본 고도성장의 주역이었다.

그는 의장대 사열을 받은 뒤 도착성명을 통해 "양국간 역사에 불행한 사건이 있었음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로 깊이 반성하는 바입니다" 라며 일본을 대표해 처음으로 사과한다는 입장을 천명, 교착상태에 빠진 한.일회담의 전망을 한층 밝게 만들었다.

이제 일본 기미가요가 연주될 차례였다. 갑자기 낯익은 곡조가 들려 왔다. 기미가요가 아닌 아리랑이었다. 나는 놀라 옆을 쳐다 봤더니 시나 역시 곤혹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대통령이 국내 반일감정을 고려한 끝에 그렇게 지시한 모양' 이라고 생각하고는 더 이상 문제삼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만찬행사에서는 기미가요가 연주됐다. 그나마 시나의 체면은 세워 준 것이었다. 공항 행사후 나와 시나는 같은 차로 숙소인 조선호텔로 출발했다.

행사 여파 때문인지 시나는 별로 말이 없었다. 우리가 시청 앞에 다달았을 때쯤 엄청난 시위군중이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며 '평화선 사수! 시나는 안중근 의사를 기억하라!' 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차가 막 숙소인 조선호텔 입구 쪽으로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펑' 하는 굉음과 함께 자동차 앞 유리창이 빨갛게 물들면서 차가 급정거했다.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상체가 앞으로 쏠린 상태에서 시이나를 부축했다.

나는 시나가 저격 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를 얼른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는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순간 또다시 '퍽, 퍽' 하는 소리가 나서 보니 시위대가 우리 차를 향해 토마토와 달걀을 던지고 있었다.

토마토가 앞 유리창에 부딪히면서 깨진 것을 나는 유혈사태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시나에게 "이건 환영의 표시입니다. 진정으로 미워했다면 총을 쐈을 겁니다" 고 했더니 시나의 표정은 더욱 굳어지는 것이었다.

이동원 전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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