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대국민 사과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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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여권의 대야(對野)공세가 한층 거칠어졌다. '언론장악 문건' 의 작성자가 이강래(李康來)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데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의 '전면투쟁' 선언이 여당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 국민회의〓2시간40여분간 계속된 28일의 국민회의 비공개 의원총회에선 야당에 대한 성토와 비난이 쏟아졌다. 그중에서도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의원에 대해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비난발언이 집중됐다.

의원들은 '악마주의' '공작전문가' '고문전문가' 등의 극한 용어까지 썼다. "박종철 치사사건을 진두지휘한 사람" (韓英愛의원), "과거 공작정치의 가운데 있었던 정형근 의원은 국민으로서의 자격도 없고, 과거 안기부에 근무했던 직원으로서의 윤리도 없다" (韓和甲총장)고 비난.

또 "요즘 언론탄압이 어디 있느냐. 오히려 언론으로부터 우리가 당하고 있다" (薛勳의원), "정부붕괴 음모기도사건에 대해선 근원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서한샘의원)는 강경대응론이 이어졌다.

문건을 전달받은 당사자인 이종찬(李鍾贊)부총재도 "기자의 습작문건을 청와대에 보고할 사람이 어디있나. 얼굴없는 증인을 상대로 국정조사를 할 수는 없지 않느냐" 고 야당측에 제보자 공개를 거듭 요구.

그러나 이에 대해 "(문건을)도둑질해간 것인지, 李부총재 사무실에서 고의가 있었는지도 밝혀야 한다" (林采正정책위의장), "그렇게 중대한 팩스를 받고도 안봤다면 누가 믿겠느냐" (韓英愛의원)는 발언도 나와 당내 '이상기류' 를 반영했다.

의원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한 李부총재는 상당한 시간을 할애, 문일현 기자에게 문건을 보고받지 않은 경위 등을 즉석 해명. 그러나 문서유출 경위에 대해서는 "우리 사무실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하고 있다. 국정조사해도 자신있다" 는 정도로 그쳐 명확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이회창 총재에 대한 성토도 이어졌다. 한화갑 총장 등은 "이회창 총재가 민주투쟁 운운하는 것은 가소로운 얘기" 라며 "민주주의를 발언할 자격은 우리밖에 없다" 고 비아냥댔다.

◇ 자민련〓박태준(朴泰俊)총재는 "여야 발표가 안맞으니 국정조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며 국정조사 전면수용 방침을 이긍규(李肯珪)총무에게 지시했고 곧바로 30여명의 의원간담회를 소집해 당론을 확인했다.

의원들은 "국민회의와 한나라당 어느쪽도 승리할 수 없는 이전투구판" 이라며 여야를 한묶음으로 성토하는 발언도 나왔다.

교착상태에 빠진 정국에 자민련의 분명한 목소리를 제기해, 문제해결의 주역으로 떠오르겠다는 의도도 있다는 게 당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정민 기자

한나라당은 28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밤샘농성을 했다. 초강경 투쟁으로 들어간 셈이다.

한나라당의 이같은 분위기는 아침부터 감지됐다. 이회창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강력한 투쟁을 선언했다.

회견장에서 李총재로부터 마이크를 넘겨받은 이부영(李富榮)총무는 "현 정권의 언론탄압으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백척간두에 있다" 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언론을 압살하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현 정권의 버르장머리를 고치자" 고 외쳤다.

이같은 분위기는 주요당직자 긴급 대책회의.의원총회 등을 거치면서 상승기류를 탔다. 당직자회의에서는 이번 사건을 '김대중 정권의 언론말살 음모 공작사건' 으로 규정했다. 문제의 언론장악 문건은 '언론말살 음모 계획서' 로 명명(命名)됐다.

회의에서 "국민회의가 국정조사 발동의 전제조건으로 정형근 의원의 사과와 선(先)제보자 공개를 요구했다" 는 보고가 있었다.

당직자들은 즉각 이를 일축했다. 무조건적인 국정조사 관철을 다짐했다. 한나라당은 자민련이 국조권 발동에 동조하고 나선 데에도 고무된 표정이다.

오후 비공개 의총에서 한나라당의 투쟁열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총무회담 결렬사실을 의원들에게 알린 李총무는 "여당이 본회의 대정부질문을 단독강행하려 한다" 며 "본회의장으로 올라가 회의를 무산시킨 뒤 그 자리에서 의원총회를 열자" 고 제안했다. 의원 1백여명은 즉각 본회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준규(朴浚圭)의장 대신 의사봉을 잡은 신상우(辛相佑.한나라당)부의장이 유회를 선언한 뒤 의총 형식의 본회의장 농성이 시작됐다.

초.재선의원들이 "즉각적으로 철야농성에 돌입하자" 는 초강경 발언을 토해냈다. 당지도부는 즉석에서 이를 수용했다. '의원들은 밤 늦게까지 발언에 나서 "사건의 본질은 현 정권의 언론정책이 시나리오대로 진행된다는 것" 이라며 여권을 성토했다.

한편 한나라당은 ▶문건이 金대통령에게 보고돼 그대로 집행됐는지 여부▶이종찬 전 국정원장 관련부분을 국민회의가 기자회견에서 은폐한 이유▶국민회의측이 문건 전달자로 지목한 중앙일보 간부의 신원을 밝히지 못하는 이유▶사건발생 직후인 지난 26일 이종찬씨와 중앙일보 문일현씨 사이의 통화내역▶이종찬씨와 문일현씨의 관계▶정형근 의원이 추가폭로한 문건을 金대통령에게 보고했는지 여부 등을 묻는 6개항의 공개질의서를 국민회의와 이종찬씨 앞으로 보냈다.

한나라당은 여권의 내분도 부추겼다. 언론장악 문건 유출과 관련, "현 정권내의 신.구주류의 암투과정에서 벌어진 일" 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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