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칼럼] 신문 지면의 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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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신문독자에게 지면 공간은 하나의 시각환경이다. 그것은 다수의 생물종들이 제 각각 자기 존재를 자랑하는 자연환경 같은 것이 아니라 공간 분할의 미학적 비율,가독성(可讀性)을 극대화하는 조형력, 공간 분배와 정보의 의미론적 중요성 사이에 균형을 시도하는 인공의 환경이다.

다시 말하면 신문 지면은 인공의 미학적 원칙들이 무작위성과의 대립으로부터 '문화' 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시키는 도시적 공간의 하나다. 그 도시적 공간에서 독자는 '난(亂)개발' 의 풍경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한국의 모든 도시들은 사람들에게 짜증.우울 등을 선사하는 잔인한 공간이며, 그 전형은 서울이다.

우리 신문들은 대체로 그 '제멋대로의 도시' 인 서울을 닮아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독자들은 신문에서조차 사람들을 어지럽게 하는 '난개발' 의 풍경들을 만나야 하고, 마치 일용할 양식처럼 일정량의 피곤과 스트레스를 공급받는다.

중앙일보도 그 예외가 아니다. 중앙일보의 1면 편집에서 자주 눈에 띄는 것은 상단 공간을 한 가운데서 분할하는 길고 좁은 한 칼럼짜리 세로 상자 기사다. 21일자 '머나먼 규제개혁'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시(視)지각의 인지구조는 '옆으로 흐르는' 장방형 구조다. 따라서 가로쓰기 조판방식은 시각 인지의 구조미학적 명령을 준수해야 한다.

그런데 한 칼럼짜리 긴 세로 상자는 시각지평을 한 가운데서 차단하고 옆으로 흐르던 독자의 눈을 다시 수직으로 곧추 서게 한다. 이같은 '지평학살' 은 안정의 파괴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자(死者)에게 '편히 잠드소서' 라 기원해 놓고 관(棺)은 똑바로 세워서 묻은 묘처럼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이런 측면에서 중앙일보가 1면 공간 분할법을 제대로 연구했는지 의심스럽다. 밀레니엄 특집 '20세기 신문' 의 경우도 특집 의도에 비해 지면 구성방식은 매우 조잡하다.

신문 지면은 제한돼 있고 이 한정된 공간자원은 많은 기사 꼭지들의 수용을 불가능하게 한다.

중앙일보의 편집 방식은 '다다익선(多多益善)' 의 신조를 '소품 다량' 방식으로 실천하려 들고 있다. 지면이 '허락하는 대로' 많은 기사를 싣는 것이 신문의 능사는 아니다.

절제의 예술은 지면 공간에도 필요하다. 중요성의 판단에 따라 기사수는 제한돼야 하며 그 제한이 있을 때에만 '비중' (의미의 배분서열)이 살아난다.

이런 '조잡성' 지적은 '20세기 신문' 의 경우만이 아니라 중앙일보 전체의 지면 구성에도 해당된다고 말해두고 싶다.

한정된 공간에 다수의 상품을 진열 배치하는 것은 동네 구멍가게의 방식이거나 대량 배치가 '선' 이라는 물량주의 신화의 실천적 과시다.

한편 한국 신문들은 신문 지면을 광고주들에게 팔 때 그 지면을 어떻게 구성하는가는 전적으로 광고주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미신이며, 더구나 해로운 미신이다. 일단 심청이를 팔아먹은 이상 심청이 운명은 뱃꾼들의 손에 달렸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문은 전적으로 심봉사가 아니고 지면의 운명은 심청이 운명과는 다르다. 중앙일보의 경우 전면 통단광고를 제외하고 이런저런 활자 광고들로 빼곡히 채워지는 '전면광고' 면이 1주일에 2~3면씩 할당되는데, 이 광고지면을 보고 있자면 신문인지 동네 잡상들의 무질서한 광고전단 집합인지 알 수 없게 한다.

중앙일보는 이 '제멋대로' 의 광고 지면이 신문의 총체적 이미지에 대한 훼손일 뿐 아니라 독자에 가해지는 시각적 폭력이라는 사실에 대해 제대로 고려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

통제가 필요하다. 통제라는 말이 너무 강하다면 공간설계에 필요한 미학적 원칙의 적용이라고 말하기로 하자. 이 지적은 다시 중앙일보 전체 지면에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다.

신문 지면은 이미 시각환경이며 그 환경은 조형미학을 요구한다.

도정일 <경희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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