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4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40. 美대통령의 약속

한국은 65년 1월 2천명의 병력을 베트남에 보냈지만 이들 역시 공병.수송등 비전투 부대였다. 내가 끝까지 '先교섭 後전투병력 파월' 을 내세워 버티자 브라운 주한 미대사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했던지 2월께 나의 미국방문을 주선했다. 5월로 예정된 朴대통령의 미국방문 사전준비 명목이었다.

드디어 3월 18일 나는 워싱턴에서 러스크 국무장관.번디 차관보와 오찬겸 회담을 가졌다. 나는 먼저 한국군 현대화와 미국의 경제원조 제공을 문서로 약속해 달라고 다시 요구했다.

그러자 러스크는 '그런 경우는 미국 외교사에 전례가 없다' 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면서도 브라운 대사의 협상전말 보고에 질렸던지 일단 타협책을 내놓았다.

존슨 대통령과의 비즈니스 미팅이었다. 러스크는 '미국 대통령이 약속하면 믿어도 되지 않겠느냐' 며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백악관으로 존슨 대통령을 만나러 갔다. 미측에서는 러스크 국무.맥나마라 국방.번디 국무차관보가, 우리측에서는 김현철(金顯哲)주미 대사가 배석했다.

내가 朴대통령 안부를 전한 뒤 자리에 앉자마자 존슨 대통령은 갑자기 긴 다리를 책상위에 쭉 뻗어 올려 놓는게 아닌가.

"명색이 일국의 외무장관 앞에서 이 무슨 결례를…" 하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 존슨 대통령의 큰 발이 놓인 탁자쪽을 쳐다 봤더니 마침 그 옆에 '말보로' 담배가 놓여 있었다. 내심 '잘됐구나' 싶어 담배를 일단 빼 물고는 "각하! 불 좀 빌려 주십시오" 했더니 존슨 대통령은 탁자 가장자리에 있는 탁상용 라이터를 집으려다 보니 결국 다리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존슨 대통령의 '무례' 에 너무 예민한 반응을 보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직접 뵈니 사진보다 훨씬 미남' 이라며 존슨 대통령을 한껏 추켜 세웠다. 그랬더니 기분이 좋은듯 "나도 그러고 싶은데 고약한 기자들이 꼭 이상한 포즈의 사진만 찍는단 말이야" 하며 큰 소리로 웃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부드러워 지자 나는 '朴대통령이 곤경에 빠진 미국을 돕기 위해 나를 이곳에 보냈다' 고 서두를 꺼냈다. 존슨 대통령도 단호한 어조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한국군 전투병력의 파병' 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베트남 전쟁은 국제적으로 반대여론이 높고 한국도 마찬가지' 라며 한.미 양국이 최선의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존슨이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자 나는 기회를 놓칠세라 준비하고 있던 말을 꺼냈다.

"각하, 이런 악조건에서 한국이 전투병력을 파견하려면 몇가지 약속을 해 주셔야 합니다. 우선 파병비용은 미국이 전적으로 부담하고 필요한 물품의 제조.수송도 한국이 맡았으면 합니다. 또 한국군도 전쟁피해가 불가피한 만큼 미군과 동등한 대우을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군 현대화와 경제발전에도 미국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 나는 단숨에 하고싶은 말을 다 쏟아 낸 뒤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그랬더니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도끼 눈' 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당치 않다는 뜻이었다.

분위기가 다시 딱딱해지자 이번에는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던 번디 차관보가 침묵을 깨고 지원사격을 했다.

"각하, 한국은 베트남전 특수(特需)를 바라고 있습니다. 마치 일본이 한국전쟁을 통해 경제부흥을 이룩한 것 처럼 말입니다. " 존슨 대통령은 그제서야 나에 대한 오해도 좀 푼 모양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나를 '한국군 파병에 반대만 하는 훼방꾼' 쯤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침내 존슨 대통령은 '실무협상을 통해 한국측 요구사항을 최대한 수용토록 하겠다' 고 약속했다.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약속을 받았으니만큼 귀국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이때부터 서울에서는 김성은(金聖恩)국방장관과 해밀턴 하우즈 주한 미군사령관이 한국군 전투부대 파병에 따른 방위력 보완방안 검토에 들어갔다.

이동원 전 외무

ADVERTISEMENT
ADVERTISEMENT